- 낡은 다이어리 속의 나의 시간들 -
소장품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벌써 버려졌어야 할,
낡고 보잘것없는 다이어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이어리들이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건,
어쩌면
한 번 마음을 주면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았든 어두웠든 내 흔적을 버리는 일이
내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낡은 다이어리를 꺼내어 들춰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혹여,
지금의 평온이 기억 속 소용돌이에서
다시 요동치는 게 싫었다.
또다시 아파질까? 겁도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연락이 끊긴 지인의 전화번호가
급히 필요했다.
핸드폰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몸은 이미 책장 앞에서 다이어리를 뒤지고 있었다.
혹여,
케케묵은 다이어리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2006’이란 숫자였다.
표지 색만 다를 뿐,
같은 디자인의 다이어리들이
거기 그렇게 빼곡히 모여 앉아
지금까지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을 법한 년도와 내 나이를 떠올리며
그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몇 살 때였을까…,
왜 하필 그 친구의 번호만 없는 걸까.’
어떤 날에는 온통 그림만 채워나갔고,
어떤 페이지에는
무겁게 눌려 있는 마음의 흔적으로.
또는 물에 번진 잉크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휘갈겨 쓴 단 한 줄의 어떤 흔적은
빽빽하게 적힌 어느 강연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그날의 일을 품고 있었다.
'꼭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 같기도 한….'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건,
지나간 아픔과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덮인 상처가 가죽 표지를 뚫고 나와
나를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온
두려움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내고 있었다.
‘냄새나는 너의 발,
그대 덕에 나의 삶에 향기가 난다.’
‘비가…, 내 가슴에 먼저 축축하게…,
늘어지듯 비가 온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상했다.
오롯이
‘그때의 나’만 존재했을 아픈 낙서에는
고단함을 떼어낸 그리움으로만 기억되는 듯했다.
그래서 많이 아프지 않게 내게 물을 수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거기에는
어딘가로 향해 바쁘게 가고 있는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풋풋하고 미숙했지만, 나름대로 애쓰고 있던…
그리고
지금의 나와는 달라 낯설기까지 한,
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에 그렇게 아팠고,
왜 그렇게 많이 울었을까.
내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록은 2006년이지만,
메모를 즐겼던 나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힘들고 아픈 나를
꾹꾹 눌러 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힘들고 아픈 순간에는 '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순간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아픔도 다시 만났다.
그 속에서 만난 수많은 ‘나’는
불안했고, 흔들렸으며, 많이 아팠지만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솔직하기도 했다.
마침내 찾아낸
지인의 전화번호는 ‘016’으로 시작되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그리고 그 옆엔 이런 문장이 남겨져 있었다.
‘친구야, 지금 잘 있는 거지?’
아마도 전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린 그 한 줄이,
다이어리 속 어떤 문장보다
더 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조금은 더 멋져진,
더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는
다이어리 속의 나와 마주하는 일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겁내지 말자.
아픈 날의 기억들도 나인 거야.”
2026년이 오기 전,
나는 또 하나의 다이어리를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편해진 나를,
그 안에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