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상실의 시간 속에서

윤동주의 <길>

by 지나
잃어버렸습니다._무얼_어디다_잃었는지_몰라_두_손이_주머니를_더듬어_길에_나아갑니다._돌과_돌과_돌이_끝없이_연달아_길은_돌담을_끼고_갑.png


물끄러미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스르르 조용해진다.
윤동주의 「길」은 어떤 거대한 진실을 외치기보다는,
낮은 숨결로 말 없는 슬픔을 건넨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오래 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듯한 느낌이다.
말끝을 흐리듯 적힌 구절들 사이사이로,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품어보았을 감정들이 고요하게 흐른다.


“잃어버렸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주머니를 더듬는 손길.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길을 걷는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허전함이 스며 나오는데,
무엇 때문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상태.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고,
어릴 적 순수함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보다 ‘잃었다는 감각’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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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 ‘길’은 현실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여정이며,
부재의 감각이 만들어낸 고요한 공간이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그 길은
쉽게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단단하고 차가운 돌이 반복되는 풍경은
마음속 무력감과도 닮아 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지만 계속 미끄러지는, 그 서글픔.


문이 닫히고,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위로 아침과 저녁이 흐른다.

그 흐름은 시간의 순환이면서도,
정체된 감정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멈춰 선 길 위에서 시간은 흐르지만,
마음은 같은 자리에서 머문다.

이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깊은 고독과 견딤이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라는 문장이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와,
담 너머 어딘가에 남겨진 ‘나’.
그 두 존재 사이에 놓인 거리는 너무도 멀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나를 잃고,
현재의 나조차 낯설어질 때가 있다.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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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이 문장은 시 전체를 감싸 안는 마지막 문장이자,
살아가는 이유를 가장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해주는 문장이다.

삶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보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여정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거창한 꿈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시에는 화려한 수사도, 격한 감정도 없다.
그저 아주 오래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속삭임이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윤동주의 시는 슬픔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을 조용히 껴안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위로받는다.
길을 걷는 그 사람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 잃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다.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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