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날엔, 이유 없는 마음을 안아본다

윤동주의 <바람이 불어>

by 지나
바람이 불어.png 윤동주 <바람이 불어>


봄이다.
햇살은 부드럽고, 나뭇잎은 부쩍 연해졌다.
하지만 마음은, 꼭 계절만큼 환하지 않다.


요즘 유난히 흐린 날이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이 흐렸다가, 또 괜히 눈부시게 맑아지곤 했다. 그렇게 무심하게 변하는 하늘 아래 서 있다 보면, 이유 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꺼내 들여다보게 된다. 그건 특별히 무거운 일 때문은 아니고,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날들이 있다. 내 안에 머물던 감정의 먼지들이 바람을 타고 일어나는 날.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는 그런 날, 가만히 내 옆에 와 앉았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첫 문장에서부터 나는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 시는 나를 위로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모호한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바람이 불듯, 마음도 어느 날엔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걸—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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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한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그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이유 없는 괴로움이라니. 어쩌면 가장 흔하고도 말하기 어려운 감정. 누구나 그런 날이 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사무치는 이별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무겁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감정에 이유를 달아야 안심한다. 그래서 ‘이럴 만한 일이 있었지’, ‘그땐 힘들었으니까’ 하고 억지로 해석하려 든다. 하지만 이 시는 그런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괴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그 부분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요즘의 나도 그러했으니까.
속이 텅 빈 듯한 날, 그 공허함에 대해 설명하지 못해 더 서러운 날.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려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에 답을 못 해 혼자 입을 닫아버린 적이 많았다. 그럴 때 이 시를 읽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위로라는 건 어쩌면 ‘너는 왜 그런 기분이야?’라는 질문 대신, ‘나도 그런 날 있었어’라고 말해주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가 끝으로 갈수록 오히려 단단한 문장이 등장한다.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흔들리는 마음을 품은 시인의 발이 딛고 있는 자리는 의외로 단단하다. 그건 현실을 견디는 자세일까,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려는 의지일까. 나도 그런 감정을 안다. 아무도 모르게 속은 뒤죽박죽인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는 마음. 흐르는 강물 옆 언덕 위에 조용히 서 있는 사람처럼. 그 자리는 분명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안의 고요는 긴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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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자주 산책을 한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잠깐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오히려 뭔가 툭 치고 가는 기분도 든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 다가왔다가 스쳐가는 것처럼. 마치 이 시처럼.


오늘은 날이 맑다. 햇살도 좋고, 바람도 기분 좋게 분다. 그런데 어쩐지 윤동주의 시가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어쩌면 시는 흐린 날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맑은 날의 쓸쓸함도 함께 끌어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괜히 기분이 좋아야 할 것 같은 날, 도리어 마음 한쪽이 허전한 건, 분명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시를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을 살짝 들여다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내 안의 고요한 감정이 조금씩 말을 시작한다.
오늘 나에게 그런 시간을 건넨 시.

바람이 부는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에도,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시.

그래서 나는 이 시가 좋다.

내 마음도, 바람처럼 이유 없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걸 허락해주니까.
그리고 그런 날들을 ‘살아낸다’고 말해주는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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