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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비밀 번호 좀...

13. 남편말 번역가

by 육십사 메가헤르츠


몸이 좀 이상한데....?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에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목이 칼칼한 듯 하지만 금방 나아지고, 얼굴이 화끈 거리지만 열은 없고, 체한 듯 몸살 같지만 다음 날이면 괜찮은 그런 증세.


동굴 앞에서 삼겹살을 구워가며 겨우 끌고 나온 남편(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bk0306nz/103)과 대화를 하다가 이런 나의 증상을 말했다.


“여보. 이렇게 소화 안되고 체한 느낌이 뇌출혈의 한 증세일 수도 있데! 혹시.. 내가.. 갑자기 쓰러지면 병원에 바로 연락해야 돼! 알겠지? ”


와이프가 이런 말을 한다면, 보통 일반적인 남편들은 뭐라고 반응할까?


Lv1.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큰소리치는 스타일)

Lv2. “쓰러지긴 뭘 쓰러져~에휴." (귀찮아하는 스타일)

Lv3.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당신을 업고 뛰어서라도 병원으로 달려갈 거야. 당신 먼저 가면 나도 따라가야지! “ (오버 스타일)

Lv4. “무슨 그런 생각을 해.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해.” (내 기준 가장 이상적인 스타일)


각자 레벨에 따라 이 정도의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그 사람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큰일 생기기 전에 당신 통장 비밀 번호 좀…"

“………………………??? (한참을 쳐다본다)

우와…………… 씨…………. “



운동할 때만 입에서 나오는

‘참외씨, 수박씨 아니고 우와씨’가 자동적으로 나왔다. 농담 치고, 아주 현실적인 대답이라 입가에 미소가 싹 사라졌다. 심지어 보이스피싱도 대놓고 비밀번호를 달라고 하지 않는 세상인데 말이다.


순간 머릿속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 구름이 펼쳐졌다. 병원에 입원해 누워있는 나에게 남편이 스리슬쩍 다가와 비밀번호를 물어본다. 아파 누워있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두 자리까지만 말하고 콜록콜록 피를 토하다 쓰러진다. 나머지 번호 두 자리를 듣지 못한 남편이 나를 흔들며 외친다.

"여보! 나머지 번호도 말해주고 가야지~! 안~돼~~~!!!"


그러자 오른발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발로 차버릴까…?’ ‘다시 동굴에 넣을까…?’ ‘남편 말 잘하는 법, 이런 수업은 없나?’ 생각하던 중 남편이 말했다.


“비밀번호가 뭐 0000 아니면 000000 아니면 000000이겠지~“


다행스럽게도 아니, 신기하게도 다 틀린 번호만 말해서 안심이 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내 기분도 풀렸다. 나에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상황을 웃픈 상황(웃기면서 슬픈 상황)이라고 하던가?


남편 덕분에 아픈 것 같은 몸이 싹 나은듯했고, 나는 오늘도 혹여나 아플까 운동을 열심히 했다. 내가 건강하고 오래 살도록 동기부여해 주는 남편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 사실 가장 필요한 건 정확한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현실적이거나, 너무 무뚝뚝하거나, 혹은 너무 과장되게 반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소 엉뚱한 반응 덕분에 오히려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나아지기도 한다. 결국 건강을 지켜주는 건 약도 병원도 아닌, 함께 웃을 수 있는 부부 사이가 아닐까 싶다.


번역 결과

다시 감기가 유행이라 그런 걸 거야. 너무 안 좋은 것 같으면 약 갖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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