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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북한산— 가장 긴 하루를 걸어 올라간 정상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여의나루역 2번 출구.
서울 제로포인트의 출발점은 늘 같지만
걸음의 풍경은 매번 달랐다.


아침 9시, GPS 인식을 맞추고 천천히 걸음을 시작했다.
한강 바람은 잔잔했고,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 북한산 백운대였다.


홍제동으로 향하는 발걸음


여의도를 지나 홍제동으로 접어드는 길에서
도시는 조금씩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골목의 공기가 바뀌고
사람들의 표정도, 건물의 높이도
어느 순간 부드럽게 달라졌다.


그때부터 산행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령길을 따라 걷다


이어령길로 들어서자
도시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걸음은 조용한 숲의 기운을 머금었다.
이 길은 늘 말없이 사람을 산으로 이끌었다.


낙엽이 발끝에서 부서지고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도 잦아들었다.
나는 그 고요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꾸준히 걸었다.


평창동을 지나 정릉4동으로


평창동 골목을 스치듯 지나
정릉4동으로 향하는 길은 의외로 길었다.
서울의 가장 고요한 변두리를 걷는 기분.
가끔씩 만나는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산행 전의 긴장을 잠시 풀어주었다.


대성문으로 오르는 가파른 숨


정릉4동을 지나
본격적으로 대성문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 시작됐다.
가파른 오르막, 돌길, 좁아지는 등산로.
몸은 금세 뜨거워지고
숨은 점점 짧아졌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길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대성문에 닿았을 때
흐린 하늘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이
하루의 무게를 잠시 잊게 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다


대성문을 지나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하늘은 아주 천천히 보랏빛으로 변했다.


“금방 어두워지겠다. 조금 서두르자.”
친구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바람이 잔잔하게 스쳐 지나가고
능선 위의 풍경은 장면처럼 멈춰 있었다.


찰칵—
그때의 공기와 빛을 붙잡듯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백운대 정상에 오르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돌길은
길고 가팔랐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정상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운대 정상.


도시는 발아래 끝없이 펼쳐지고
하늘은 마지막 남은 빛을 건네주고 있었다.
긴 하루가 하나의 장면처럼 눈앞에 겹쳐졌다.


아침 9시에 시작한 걸음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총 12시간 45분, 27.3km.
오늘의 산행은
서울에서 가장 길고도 고요한 하루였다.


밤차로 내려가는 길


하산은 이미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
헤드랜턴 불빛 아래
돌계단이 흐릿하게 보였고
발바닥은 뜨겁고 무거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오늘도 잘 걸었다.”
그 생각 하나면 충분했다.


서울의 밤공기를 가르며
나는 밤차에 올랐다.
지친 몸으로 창가에 기대자
도시는 어느새 멀어지고
오늘 걸은 길이
한 장의 그림처럼 조용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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