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쯤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것이 두려웠다. 똘이가 밤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일까 봐…. 내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한 통의 전화였다. 숨을 멈추고 각오를 다지며 전화를 받았다.
“강아지가 진정이 되어 이제 수술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수술에 들어갑니다.”
지옥 문턱까지 갔던 나에겐,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소식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전날 수술 전 동의서에 이미 서명해둔 상태였다. 수술 중 사망할 수도 있다는 항목까지 포함된 동의서였다. 항목들은 사람의 수술 동의서와 거의 동일했다.
수술실 앞 대기실에는 나와 같은 반려견 보호자들이 모여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타는 심정으로, 수술이 성공하기를, 죽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 모습은 사람 수술 대기실과 다르지 않았다. 반려견은 정말 사람과 다름없는, 때로는 사람 이상인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2009년이었는데, 그로부터 9년 전에도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식도암 3기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을 받으셨을 때,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수술 대기실 앞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보다 훨씬 길어진 8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직후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은 당시 20대였던 내게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온몸에는 수많은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채로 갓난아이처럼 팔다리를 버둥대고 계셨다. 눈을 감은 채 고통에 찬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낮에 잡지에서 본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 얼굴이 겹쳐 떠오르면서 ‘삶이란 왜 이토록 고통스럽고 잔혹한가’라는 고뇌에 사로잡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작을 겪기 시작했다. 심장외과를 시작으로 신경과와 정신건강의학과 등 여러 과를 전전한 끝에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질환이었기에 진단받기까지도, 버텨내는 시간도 몹시 힘겨웠다.
똘이의 사고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또다시 수술 대기실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수술 잘 되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강아지가 너무 작아서, 수술에 의사 선생님이 12명이나 들어갔어요.”
세상에, 12명이나…. 대체 얼마나 정밀한 수술이었단 말인가.
“사고 당시 횡격막이 찢어지면서 폐가 그 틈을 통해 위로 솟아올랐어요. 폐를 적당히 아래로 내리고, 찢어진 횡격막을 꿰매는 수술을 했습니다.”
왼쪽 골반뼈에도 금이 갔지만, 마취 시간을 더 늘리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해 골반 수술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똘이의 주치의이자 똘이 엄마를 키우셨던 선생님이 따로 골반 수술을 해주셨다. 강아지는 한쪽 골반뼈가 없어도 큰 문제는 없다고 하여 골반뼈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수술로 인해 똘이는 평소엔 걷는 데 지장이 없었지만, 뛸 때는 한쪽 다리를 들고 뛰었다. 왼쪽 다리가 약간 짧아지고 뛰는 데 잘 쓰지 않았기 때문에, 노후에는 근육이 매우 약해졌고, 나는 손으로 똘이의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재활운동을 해주어야 했다.
며칠간 입원해 있던 똘이를 데리러 간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똘이는 배에 붕대를 감은 채였지만,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크게 짖었고, 아플 텐데 온몸도 격렬하게, 꼬리도 촐랑촐랑 흔들며 내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누나. 반가워요, 누나. 빨리 나를 안아줘요.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전날 수술한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똘이는 여전히 경쾌하고 밝았다. 그때 세상을 떠나지 않고 대수술을 견뎌내어 17년 5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해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이다. 생명력 강하고, 밝은 에너지를 지녔던 똘이…. 나는 매일매일 그를 그리워하고, 기리며, 내 마음 깊이 간직한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