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차는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줄까?
멀쩡하게 대기업에 잘 다니던 친구 K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교사 임용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 그 친구를 따라 노량진 학원가에 갔던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 무심코 교직과정을 이수해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교사 임용시험을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학에 다니는 동안‘졸업해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에도 중국어는 더없이 재미있었고 베이징에서의 유학 생활도, 홍콩에서의 직장 생활도 흥미진진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늘 그때 그 순간에만 충실했을 뿐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꿈이나 계획은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홍콩계 다국적 기업에 다니면서도 좀 더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싶어 매일같이 구인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물론 그 당시에도 교사라는 직업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도 노량진 학원가에 따라나섰던 건 문득 어릴 적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란에 습관처럼 '선생님'이라고 썼던 기억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나선 노량진의 학원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사람들의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았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에 삼선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그들은 빛이 났다. 꿈을 향한 열망과 간절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노량진의 뜨거운 분위기는 나의 안온한 일상에 불을 붙였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직장인의 일상이 1년쯤 지속되었을 때였기에 한동안 곤히 잠자고 있던 나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 다시 눈을 번쩍 뜬 것이었다.
“나도 한번 도전해볼래! 어릴 적 별생각 없이 썼던 장래 희망에 뒤늦게 도전해보는 거, 좀 멋지잖아!”
난생처음 가본 노량진 학원가에서 갑자기 임용시험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랐다. 대학 때 무심코 교직과정을 이수해둔 게 어쩌면 운명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나는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호기심만으로 임용시험이라는 세계에 덥석 발을 내딛게 되었다. 어쩌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무료한 직장인의 일상 속에서 뭔가에 몰두할 일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소위 '합격'이라는 짜릿한 기분을 경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한 건 정작 나를 노량진에 데려간 친구 K는 결국 다른 진로를 택했고 엉뚱하게 나만 임용시험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
하지만, 교사 임용시험은 호기심만으로 합격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대학 때 전공 공부도 열심히 했고 졸업 후에도 중국과 홍콩에서 4년이나 살다 왔으니 임용시험쯤이야 가뿐하게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그제야 비로소 현실 파악이 되었다.
‘대체 내가 뭘 믿고 한 번에 합격할 거라고 자신했던 걸까? 왜 대책도 없이 이 나이에 회사를 그만둔 거지?’
늘 그렇듯 이번에도 아무 고민 없이 덥석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뒤늦게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냥 좋은 경험한 셈 치고 다시 회사에 다닐 것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임용시험을 준비할 것인가.
하지만, 그 고민 역시 그리 신중하게 이어지진 못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다소 뜬금없지만,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심리상담센터였다. 과연 서른 살에 임용시험에 도전할 수 있는 지능인지 IQ 검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크게 나쁘진 않은 지능이 나왔고 나는 고민 없이 그날로 '수험생'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회사원에서 순수 수험생이 되자니 불안했다.
고민 끝에 대학 4년 내내 다녔던 중국어학원의 원장님을 찾아갔다.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아르바이트로 할 수 있도록 강의를 몇 개만 달라고 무작정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원장님은 흔쾌히 강의를 주셨고 그때부터 반나절은 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하고 반나절은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부하는 반쪽짜리 수험생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결국 시험을 딱 100일 앞두었을 때 중국어 강의를 모두 그만두고 노량진 학원가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절박해졌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박함이었다.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닌 합격하고 싶다는, 꼭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서른한 살의 나를 고시원 작은 방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때부터 100일 동안은 그야말로 공부에만 몰입했다, 고작 3개월 남짓한 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시간이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공부하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했다.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호기심으로 친구 따라 노량진 학원가에 갔고 그곳이 주는 에너지에 반해 호기심으로 임용시험을 봤으며, 뒤늦게서야 진지한 고민을 거쳐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 나이 서른한 살에 교사가 된 것이었다. 물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결과가 해피엔딩이었을 뿐, 그것이 내 꿈을 이룬 감격스러운 성취는 아니었다. 당시에 나를 고시원 작은 방으로 밀어 넣은 간절함은 내 꿈을 향한 간절함이라기보다는 퇴로가 막힌 간절함과 승부욕, 자존심 등이 그 실체였을 것이다. 반드시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불합격해서 자존심이 상한 마음, 그리고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돌아갈 길이 없었던 상황이 나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겉보기에는 마치 오랜 꿈을 이룬 것처럼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이번 역시 그 과정 안에 꿈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호기심으로 선택하고 간절함으로 얻어낸 교사라는 직업은 내 적성과 흥미에 더없이 잘 맞았다. 비록 꿈을 따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운명처럼 느껴질 만큼 만족스러운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인생이 그만큼 더 풍요로워졌으니 나의 못 말리는 호기심과 성급한 선택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처럼 대학 졸업 후에도 베이징으로, 홍콩으로, 다시 한국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여러 차례 기차를 갈아탔고 서른한 살에 또다시 기차를 갈아타게 되니 문득 궁금해졌다.
‘설마 이거 잘못 탄 기차가 아니겠지? 이 기차는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겠지?’
하지만, 그때만 해도 잘 몰랐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더 재미있고 다양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말이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은 기차를 갈아탈 일이 없었지만, 기차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기차를 갈아탄 것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결국 인생에서 간이역에 정차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초고속으로 달리는 KTX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