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줄까?
아무리 꿈보다 호기심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고 해도 이 나이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이젠 좀 신중해질 나이가 된 것도 같은데, 어쩌자고 덥석 이런 결정을 한 걸까 싶었다.
거창한 뜻을 품고 교사가 된 건 아니었으나 감사하게도 교사라는 직업이 참 좋았다. 어느새 20년 차 교사가 되었지만,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재미있었고 교실에서 아이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도 그들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시험문제 출제나 생활기록부 기재 등으로 긴장도나 피로도가 높아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오래 교사로 근무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마음은 내가 꽃길만 걸어온 교사인 덕분일 수도 있다.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나는 줄곧 비평준화 지역의 우수한 고등학교와 특목고, 교육열 높은 지역의 중학교에서만 근무해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온순한 아이들을 만났다. 가끔 학생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일도 있지만, 그래봤자 순간의 감정일 뿐,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순했고 늘 나에게 가르치는 보람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러한 행운 역시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래오래 교사로 지내다가 퇴직 후에는 마음 맞는 대학원 친구들과 함께 작은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교감 선생님께서 나에게 교육전문직, 즉 장학사 시험을 준비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하셨다. 사실 그런 권유는 예전에도 몇 번 받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방학이 중요했다. 학기 중에 휴가를 전혀 쓸 수 없는 건 불편했지만, 대신 휴가를 한꺼번에 몰아서 쓸 수 있는 방학이 나에겐 삶의 큰 활력소가 되었다.
총 휴가 일수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일반 직장에서는 휴가를 한꺼번에 몰아서 쓸 수 없으니 휴가를 쓰는 심리적 차이는 적지 않았다. 방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여행책도 여러 권 쓸 수 있었고 여행을 통해 에너지도 회복할 수 있었으며 대학원 공부도 따라갈 수 있었기에 방학은 나의 워라밸을 지탱해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물론 행정, 기획 업무에 흥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여전히 즐겁고 재미있었기에 굳이 교육전문직으로 전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10년 가까이 대학원을 다니고 논문을 쓰느라 다른 진로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책 쓰고 공부하고 여행 다니면서 틈틈이 블로그도 운영하는, 워라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현재의 삶이 꽤 만족스러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서 받는 에너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교감 선생님의 권유는 끈질겼다. 내가 여러 차례 완곡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경험 삼아 시험이라도 한번 보라고 계속 권하셨다.
문득 ‘대체 장학사 되는 게 뭐가 그렇게 좋길래 이토록 계속 권하시는 걸까?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 걸까?’궁금해졌다. 이번에도 또 나의 못 말리는 호기심과 종잇장처럼 얇은 귀가 문제였던 거다.
결국 난 가벼운 마음으로 딱 한 번만 시험을 준비해보기로 했다. 사실 이런 결정을 한 이면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노후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학교생활이 힘들어졌을 때, ‘장학사 시험이라도 한 번 볼걸' 괜한 미련이 남으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난 무슨 일이든 일단 경험해보아야 후회도 미련도 없을 거란 마음으로 덥석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인생 후반전을 앞둔 시점에서 진로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이었음에도 마치 롤러코스터에 도전하듯 호기심으로 시작한 공부였다. 시험을 보기로 하고 스터디 모임에 들어가긴 했지만, 간절함이나 확신이 없었기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호기심’과 ‘미련 버리기’라는 동기만으로 하기엔 공부해야 할 분량이 너무 많았다. 결국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결과는 1차 합격.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만에 하나 진짜로 합격하면 어쩌지? 이럴 거면 힘들게 박사 학위 논문은 왜 썼을까? 내가 방학이 없는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난 빨리 새 책을 쓰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 방향은 아닌 거 같은데....’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면서 심란한 마음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렇게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2차 시험에 응시했는데, 온 우주의 운이 나에게 자석처럼 끌려오기라도 한 건지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거짓말 같은 결과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젠 정말 무를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이 학교를 떠나 교육전문직으로 전직을 하게 된 것이다. 교사가 아닌 교육 공무원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셈이다. 회사원에서 뒤늦게 교사가 되었는데,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신중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채 호기심으로 결정했고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냉정하게 고려해봤을 때 이건 아무래도 잘못 탄 기차인 것 같지만, 지금 와서 내릴 수도 없었다. 즐거운 교사에서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장학사가 된 것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고, 공부해놓고는 안 한 척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이 제일 당황스러운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굳이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하필 내가 시험을 본 해의 출제 경향이 암기 위주가 아닌 실천 사례 중심이었고, 시험 유형에서 논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소 높았기에 학위 논문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가 공부량이 부족했음에도 엉겁결에 합격한 듯하다. 물론 온 우주의 운을 받았을 수도 있고.
돌이켜 보면 난 인생에서 늘 이런 식이었다. 뭐든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일단 저지르고 난 뒤에야 눈앞에 닥친 상황을 부랴부랴 수습해왔다. 중국에서의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홍콩에서 회사에 다니기로 할 때도, 회사를 그만두고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기로 할 때도,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까지 도전해보기로 할 때도 오래 고민하고 신중하게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그 순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단 결정부터 하고 난 뒤, 다음 대책을 고민하면서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이제 그런 대책 없고 즉흥적인 삶의 패턴은 그만 반복해도 좋으련만 결국 이번에도 나의 신중하지 못함과 호기심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낯선 기차를 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또다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2021년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