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을 보지도 못한 가정 시간을 넘어서
제가 학교 다닐 땐 가정 시간이 있었어요. 중학교 2학년이었나, 재봉틀의 원리에 대해 중간고사를 보아야 했습니다. 노루발이 어떻고 무슨 스티치가 어떻고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열심히 외웠어요. 지금 생각해도 황당했던 건 가정 시간 내내 직접 재봉틀을 사용해보기는 커녕 보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셨을 선생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시절 교육 진짜 후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영어를 저의 중학교 가정 시간처럼 배웠습니다. 아무리 나중에 장롱면허가 되더라도, 운전을 배울 때 주행 실기 연습은 하잖아요. 옛날 영어는 주야장천 필기시험만 준비시키네요. 우리는 일상에서 쓸 기회도 별로 없는 외국어를 억지로 배웠고, 게다가 100점 만점 점수로 줄 세워 가며 성적을 받았습니다. 제일 슬픈 건 외국인을 보면 울렁증이 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뭐 죄진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기분이 들어야 하죠?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했는데 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력이었네요. 황당하고 허무합니다.
저는 외국인과 고등학교 때 처음 대화해 보았습니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했거든요. 가보니 학생들 과반수 이상이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왔더라고요. 독일어랑 영어 회화 시간이 있긴 했는데요, 일주일에 겨우 2시간이었어요. 학생 25명이 외국인 선생님이랑 한 마디 씩 하면 수업 끝이었어요. 대부분 아이들이 회화 점수 만점을 받는데, 전 꼭 선생님이 1~2점을 깎더라고요. 제 기억으로는 원래는 외고는 회화랑 듣기가 각각 일주일에 10시간이어야 했지만, 학교는 그 시간을 대부분 자습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외고 학생들은 독어 듣기 시간에 수학 문제집을 풀었습니다.
영국 작가이자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연애와 사랑에 관해 강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랑은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사랑은 외국어 공부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몇 번 노력해 보고 아 난 잘 안 된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시로 들었던 외국어가 한국어랑 핀란드어였습니다. 영어권 작가가 생각한 가장 이국적이고 어려운 언어였나 봐요. 그때 전 생각했습니다.
'너네가 봐도 한국어가 어렵지?'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는 유럽의 외국어들이 참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한국의 똑똑한 부모들이 그 귀한 아이들을 비싼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레벨 테스트를 준비시키겠어요. 근데 반대로 생각하니 이러네요. 외국어 공부가 사랑과 비슷하다면 어떤 한국 아이들은 외국어랑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강제조혼을 당하는 건가?
뭐 학습이란 건 어느 정도 부모가 개입하는 거니까요, 언어에 대한 관심 같은 것도 부모님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느 정도 맞습니다만. 근데 그 부모들의 외국어에 가졌던 서러웠던 감정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면 어쩌죠? 이건 후진 외국어 교육의 폐해가 아동인권의 문제로 확대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은데요. 만 3세 한국 아이들끼리 모여서 고작 영어 때문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선생님 하나만 바라보다가 놀잇감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하루에 4시간이나 있어야 된다고요?
“아이에게 눈 깜빡임 같은 ‘틱’ 증상이 생길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A 씨가 소위 ‘영어유치원’이라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하 영어유치원으로 표기)에 아이를 보내며 들은 당부 사항이다. (세계일보 2024.2.27)
자녀를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이유가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라고들 하던데요. 틱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진짜 자연스럽나요? 요즘은 학교 등수 같은 것이 더 이상 안 나온다는데 미취학 아이들의 영어실력을 테스트하고 성적을 내서 서열을 매긴다는 게 너무 이상합니다. 한국애들이 모여서 한국말로 수다도 못 떨고, 놀지도 못하고 영어를 배운다던데 이게 어떻게 자연스러운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중언어를 "자연스레" 배우는 건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 사실 한 가지 언어만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다양한 언어 구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물론 네덜란드니 스웨덴 같이 잘 사는 나라 아이들이 방학마다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 나라로 휴가 가서 연애하며 배우는 그런 외국어도 있어요. 하지만 많은 경우 대부분의 경우 외국어를 많이 아는 민족들은 사회적으로 취약합니다. 예를 들어 신장 위구르에 사는 타지크인은 중국어를 하지만 한족들은 타지크어를 안 한답니다.
성인이 겪는 외국어 습득의 어려움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입과 혀를 이용해 말을 만들어 내는 운동기능의 문제래요. 요즘 "흘려듣기"라는 말을 자주 쓰더라고요. 우리 귀가 다양한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하고 외국 드라마 등을 보고 외국어 잘하는 사람도 진짜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입력 중심의 수동적 학습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출력, 곧 말하기 중심으로 적극적 학습을 하면 더 어렵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뇌가 아, 이게 중요한 거구나 싶어서 더 기억을 잘한다네요. 외국어 낭독은 그래서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랍니다. 1시간씩 소리 내어 글을 읽어보면 안 쓰던 근육을 써서 입이 얼얼합니다. 고미숙 선생님도 낭독의 힘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외국어 실력 향상과 더불어, 동양의학 시각에서는 낭독을 하면 물의 기운이 좋아져서 신장의 힘을 기를 수 있다네요.
실망스럽지만, 외국어 습득하는 건 뭐 대단한 요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가 외국어 고수들이 낸 결론입니다. 원래 뻔한 게 지키기 제일 어렵습니다. 성인이 아이들에 비해 언어습득력이 떨어지는 진짜 이유는 언어 공부에 투입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짧아서랍니다. 언어학적으로 먼 언어를 배울 때 중급 수준까지 도달하는데 2200시간이 걸린다고 하죠? 하루에 1시간씩 공부했을 때 유창해지기까지 약 6년이네요.
그럼 다국어 구사자 (Polyglot)는 머리가 좋아서 외국어를 몇 개씩 하는 거냐? 그것도 아닙니다. 외국어는 지능과 비례하지 않는대요. 타고난 재능과 무관하고, 5개 국어 이상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어항목만 좀 높고 평균 이하의 지능을 가졌대요. 그리고 선입관과는 다르게 아이들보다 성인이 외국어를 더 빨리 습득할 수 있답니다. 아, 딱 하나 원어민 발음을 가지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아이들은 신경 근육 구조상 발음이나 억양이 어른보다 낫지요. 근데 그것뿐이래요.
발음이 좋으면 나쁠 건 없죠. 반기문 총장님의 영어를 들은 한국 사람들이 이 사람 영어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했대잖아요. 근데 언어에서 발음이 다가 아니고, 그 발음이라는 것도 엄청 다양하잖아요.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가장 부러웠던 이들은 이탈리아나 그리스 학생들이었습니다. 다들 악센트가 엄청 심했고, 소위 RP라고 부르는 영국 발음을 구사하는 학생들은 진짜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영어 고급 단어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에서 온 경우가 많잖아요. 논문 쓸 때 이들이 선택하는 단어들은 영국학생들까지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또한 알랭 드 보통 얘기 나올 때 예상하셨겠지만, 연애하는 게 외국어 습득의 최고의 방법인 듯합니다. 칠레에서 왔던 교환학생은 맨 처음에 만났을 때 정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구사했어요. 이 친구가 영어의 달인이 되기까지 딱 1년 걸리더라고요. 그 남학생이 영국 여자친구를 사귀었거든요. 원래 언어습득 과정에 감정이 실려야 기억도 잘 난대잖아요.
성인이 된 우리들, 연애하듯 언어를 배우면 어떻게 될까요. 연애를 하는 것처럼 언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나의 문화적 경험을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고 "번역가"의 시각에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지도 않는답니다. 연애를 하면 사람이 달라지듯 손미나 작가님이 말하길 외국어를 하면 목소리도 달라진답니다. 수많은 자아가 생깁니다.
소음 같던 언어가 일상이 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연애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대와 설렘은 실망으로 바뀌고요, 나만의 짝사랑인 것이 명확해지기도 합니다. 진짜 운도 중요하고요, 내가 이 언어를 좀 파보니 우리가 그래도 통하는 구석이 있구나 싶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과 육아 등으로 바쁠 성인이 하루에 한 시간씩 6년씩이나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아요.
날씨 좋았던 오늘,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갔습니다. 처음 보는 아이들도 어느새 친구가 되어 신나게 뛰어놀더군요. 4살 저희 아이부터 12살 누나까지 섞여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어떤 아이 둘이서 조심스레 무리에 다가왔습니다.
"Do you speak English?"
그러자 옷차림부터 노는 모습까지 "야성적"이었던 10살 초등 형아가 "Yes, but I am from Germany" 그러더군요. 영국에서 왔다는 소년들은 아주 기뻐하며 더듬더듬 독일어를 통성명을 해 나갔습니다. 야생 초딩 형아의 영어 실력은 간단한 인사말과 숫자세기(그나마 숫자 몇 개는 빼먹더라고요 :-)가 전부였어요. 하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은 미끄럼틀 주위에 걸쳐 앉아 열심히 대화를 나누며 놀이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아마 이 영국소년들은 금방 독일어가 늘 것 같습니다. 2시간 넘게 꽥꽥 소리를 질러가며 독일애들이랑 뛰어노는데 안 느는 게 이상하겠죠.
모르는 애들이랑 놀아 봤던 경험이 많은 애들은 외국인 앞에서도 아주 편합니다. 처음 보는 4살 아이와도 재밌게 노는 10살 초등형아가 영국애들이 뭐가 부담스럽겠어요? 놀이터의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외국어가 자연스러워지는 이상적인 방법은, 나와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놀아본 경험을 많이 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정시간에 재봉틀 한 번 못 만져보고 노루발이란 단어를 외워야 했던 학교를 다녔습니다. 한국 사회는 외국어 트라우마 생기게 엉터리로 영어 공부 시켜놓고는 발음 안 좋다고 흉보지 맙시다. 지금도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외국어 학습에는 나이는 전혀 상관없고 심지어는 치매 예방에도 직방이랍니다. 손미나 작가님은 "외국어에 대한 열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로맨스이다"라 하십니다. 요즘은 재봉틀, 아니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들이 곳곳에 넘쳐 납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이 외국어와 놀아보고 연애하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