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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Feb 27. 2024

우울할 때 나가서 걷는 방법

누가 운동은 해 봤냐고 짜증나게 잔소리 할 때

우울증을 오래 앓았던 헬스 트레이너 세라 커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 좀 우울해"라고 한다면, 주위에서 꼭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거랍니다. 


"운동은 해봤어?"


뭐 자매품으로는 "요가는 해봤어?"가 있답니다만. 좋은 뜻으로 했든 아니든 참 도움 안 되는 말입니다. 거기다 몸매에 대한 언급까지 나온다면 그냥 귀를 닫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 운동을 하러 찾아가면, 사람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반말로 "5KG 빼줄게" 같은 발언을 하는 트레이너가 앉아있기도 합니다. 솔직히 이런 이들에게는 운동 안 배우니만 못합니다. 그런 류의 "충고"는 나를 대놓고 괴롭히고 모욕하겠다 작정한 사람이 하는 거랍니다. 


쓸데없는 충고는 넣어두세요. 세라 커책의 말대로 우리의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뭘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우리의 슬로건은 No Pain, No Gain 따위가 돼서는 안 됩니다. 시작을 더 힘들게 만드는 말이니까요. 이 건 80년대 미국 중상류층에게 유행하던 말인데 언젠가부터 "괴로움"이 노력의 기본값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이 괴롭지 않으면 제대로 안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덩달아 운동 전문가들은 자꾸 우리한테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라고 난리를 칩니다. 우리를 자꾸 함부로 대하고 꾸중합니다. 가시적 성과가 안 나오는 건 (몸매가 안 예쁜 건) 이게 다 나의 의지부족이라고 비난합니다. 


운동 까막눈인 저, 이 글을 쓰면서 하나 알게 된 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운동은 할 수 있고, 싫지 않은 운동이라는 겁니다. 아이스크림 사러 가게에 갔다 오는 거도 운동이고요, 심박수가 조금 올라가는 정도의 운동, 심지어는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것도 다 신경계를 활성화하고 뇌 혈류를 증가시키면서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쉽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PT도 필라테스도, 수영도. 뭐 좋다고 하는 데 등록하기도, 시간 맞추기도, 운동복 챙기기도 다 귀찮습니다. 지금 수영복이 다 안 말랐어도,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거를 하기로 합니다. 그냥 밖에 나가서 걷는 겁니다. 



동양의학에서는 걸으면, 신장과 연결되는 발바닥 용천혈이 자극된다고 보았습니다.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린 이유가 이 원리랍니다. 신장의 물의 기운이 움직이면 상체의 불길이 잡힌다 하여 걸음이 치유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네요. 그리고 "나가서 걷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정신 건강에 탁월한 선택입니다. 


첫 번째, "나가서" 한다는 게 참 중요합니다. 실내에서 기구를 사용해서 걷는 것하고 자연에서 걷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걷기의 과학에 대한 책을 쓰신 신경과학자 오마라 교수님도 역시 인터뷰에서 최대한 인공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걸으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한 연구에 따르면 같은 거리를 1) 지하 터널을 이용해 걸었을 때와 2) 자연친화적인 도심 내 강가를 걷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걷기 후의 기분이 어떨지를 예측해 보라고 했대요. 다들 자연 속 걷기의 효과를 상당히 과소평가하더래요. 그런데 실제 기분을 측정해 보니 1) 실내 걷기보다 2) 야외 걷기의 점수가 무려 33%나 평균보다 높게 나왔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 가장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산책 경로는 해안가였대요. 하지만 도심 공원 걷기 역시 만족도가 높았고, 그 차이도 별로 크지 않았다고 하네요. 뭐 멀리 갈 거 없이 녹지가 조성되었다면, 도시 내에서도 충분히 자연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거예요.


또한 영국 연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사회경제적 그룹의 53%가 일주일 전에 자연을 방문한 반면, 가장 낮은 사회경제적 그룹에서는 31%만이 자연을 방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낙후된 지역에 사는 이들은 녹지에 정기적 접근이 제한적이었고, 하루 중 스트레스 감소 폭이 낮거나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높은 교육 수준, 건강 영양상태를 보이는 그룹일수록 자연과 교감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개인의 소득 수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지만, 자연에서 걷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말이죠. 


두 번째, 걷기는 거의 돈이 들지 않습니다. 오마라 교수님은 실내에서 운동 기계나 전자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생활 속에서 걷기를 실천하기를 권합니다. 또한 고미숙 선생님은 돈을 들여가며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양생의 측면에서 하수의 선택이래요. 왜냐고요? 건강을 헬스클럽 등에서 "서비스"를 받으며 해결하려 하면 몸이 일상과 분리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훨씬 더 고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아파트의 평수가 삶의 질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은 내팽겨치고 집을 토템처럼 떠받들고 있다. '사는' 곳이 아니라 '모시는' 곳. 그런 집에 머무르면 우울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파트는 더구나 사각형이다. 군대나 감옥과 뭐가 다른가. 넓어 봤자 그게 그거다. 뷰(view)가 좋다고? 그 뷰를 감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그렇게 좋으면 밖으로 나와서 풍경 속으로 들어가라. 스스로 뷰가 돼라. 남산이 한눈에 보이는 뷰를 가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남산을 걸어라...(중략).. 한강변을 바라보는 것과 그 위를 걷는 것. 어느 게 나은가? 전자는 머무르고 후자는 움직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생명의 표지는 유동성이다. 모든 세대가 청춘을 부러워하는 건 이 유동성 때문이다...(중략)... 집(사실은 골방)에 죽치고 앉아 눈동자와 손가락만 까딱하고 있다면 그건 좀비와 다름없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2018, 고미숙)
걷기 좋은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입니다 (암스테르담)


고미숙 선생님의 "뷰를 보려고만 말고, 뷰 자체가 돼라"는 말씀을 정말 여러 번 곱씹어 봤습니다. 새처럼 하늘 위에서 뷰가 된 나를 보는 상상을 해 봅니다. 선생님은 마음의 병은 내 마음속만 계속 들여다보고 역지사지가 안 될 때 생긴다고 하세요. 말 그대로 시야가 좁아져 버린 거죠. 반면 걷기를 하면 내 주위의 풍경이 어지럽지 않은 적당한 속도로 계속 변하며 시야가 넓어집니다. 


신경과학자 휴버만 교수님 역시 걷기가 정신 건강에 도움을 주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안구운동 민감 소실 재처리 요법(EMDR)의 예를 들었어요. EMDR은 눈동자를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면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을 안정시킬 때 사용하는 치료법입니다. 그리고 EMDR의 창시자 샤피로 박사 역시 공원을 걸으며 우연히 눈을 움직였더니 나쁜 기억이 사라지는 걸 발견하고 이 요법을 발전시키게 된 거래요..  


시각 자극 치료원리


이렇게 생활 속의 걷기로 건강을 되찾은 신기한 사례가 있어요. 미국의 한 남성은 무려 274kg였대요. 어렸을 때부터 비만에 시달렸던 그는 이러다 큰일 난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게 됩니다. 폭식이 일상이었던 이 남성은 어느 날 집에 있던 음식을 다 버렸대요. 그리고 그날부터 배가 고프면 집에서 1.6km 떨어져 있던 슈퍼마켓까지 걸어갔대요. 세끼를 이런 식으로 해결했다네요.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니 거의 매일 10킬로를 걸은 거예요. 그 결과 무려 150kg를 감량했대요. 이 뉴스 댓글을 읽어보니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요. 


" That’s actually genius. Walking to get food, that’s how our ancestors survived. He hunted and gathered himself thin. 

우와, 이거 완전 천재네요. 먹을 거를 찾으러 걸어가다니, 이건 우리 조상들이 살아남은 방법이잖아요. 이 사람 수렵 채집 생활로 날씬해졌네요."


걍 월마트까지 걸어갔더니 살이 빠졌어요


세 번째로, 걷기는 쉽고 싸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확장시킵니다. 뛰기와 달리 준비과정도 필요 없고, 부상 위험도 적으며, 여럿이서 같이 할 수 있습니다. 4살짜리 아이와 70세 노인들도 걸을 수 있습니다. "걷기"는 도시와 공동체를 바꿉니다. 연구에 따르면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비율이 자동차 중심도시 보다 더 낮았습니다. 반대로 미국 엘에이처럼 차를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는 인간관계의 양과 질을 떨어뜨립니다. 차가 많으면 교통 체증이 생기고요, 그럼 도시에 도로와 주차 공간을 더 짓게 됩니다. 


한국 도시들도 요즘 보면 큰 도로가 참 많더라고요. 친정이 서울 근처 신도시에 있는데요, 아이랑 어딜 걸어서 나가려면 아파트 단지 앞 6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어요. 솔직히 애를 데리고 길 건너는 게 좀 무섭더라고요. 교통 약자들이 건너기엔 너무 횡단보도가 길어요. 도로가 커서 그런지 횡단보도 신호등 바뀌는 것도 엄청 느립니다. 그러니 지각하지 않으려는 중고등학생들이 연출한 아찔한 광경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차에게 양보한 공간만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 일명 제3의 공간(third space)이 줄어들게 됩니다. (제1의 공간은 가정, 제2의 공간은 직장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연인들이 드라마처럼 길에서 서류를 보며 걷다가 부딪치며 첫 만남을 가질 수 있겠냐고요. 요즘은 다들 혼자 승용차에 들어가 있는데요. 차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지 말고, 사람 걸음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면 안 될까요? 걷기 좋은 도시가 집값도 더 비싸다는데요?




도저히 걸을 시간이 없다면 고미숙 선생님의 조언대로 과감히 차를 포기해 버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제가 아는 어르신은 베테랑 운전 고수예요. 어르신은 아직 칠순도 안 되셨는데 500미터도 안 되는 거리도 승용차를 운전해서 다니세요. 평생 앉아서 생활하셨던 이 분은 이제 도저히 횡단보도를 걸어서 건널 자신이 없으시대요. 그 결과 야외를 거의 나가시지 않으세요. 집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마트 주차장에서 다시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계속 실내에만 머물고 있는 어르신의 동선을 보며, 베이비 붐 세대가 원했던 "편한" 생활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곱씹게 됩니다. 노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차를 포기하고 더 많이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젊었을 때 운전한 거리만큼 나중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줄어든다고요. 고미숙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는 편리와 생명의 정기를 맞거래하고 있는 겁니다.


걷기 전문가 오마라 교수님은 걷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하시네요. 70세 노인들을 꾸준히 산보를 시켰더니 집에만 앉아 있는 생활을 하는 통제 그룹에 비해서 뇌의 나이가 오히려 2년 이상 젊어졌대요. 일주일에 최소 4, 5회씩 최소 30분간 대략 시속 5킬로미터 정도로 꾸준하게 걸으라고 하십니다. 이 속도도 좀 어려우시면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걸으시면 된대요. "만보"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시고요. 그건 특별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만보계 만든 일본 회사가 기억하기 쉬우라고 내세운 숫자니까요. 


나가서 걷기는 내가 있는 위치를 계속 바꾸어 줍니다. 내가 움직일 때, 세상은 사라지고 흩어지고 새로워집니다. 영어로 나쁜 감정을 훌훌 털어버리는 걸 "Walk it off"라고 한다지요? 철 지난 구호인 No Pain No Gain은 이제 접어두고, 이제 Walk it off 해봐야겠습니다. 



<표지 사진 : https://en.wikipedia.org/wiki/Walking#/media/File:CGI_Human_Walk.jpg>

<암스테르담 사진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LD_Amsterdam_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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