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의 한국
친정엄마가 아이에게 지난 1년간 아마 100번도 넘게 물었을 거다.
"우리 손주, 한국 언제 올 거야?"
우리 손주는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체 영상통화만 하려고 치면 손사래를 쳤다. 자기 지금 레고 하느라 바쁜데 할머니는 자꾸 답을 줄 수 없는 질문만 해대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질문은 사실 우리 부부를 향한 것이었다. 우리는 3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며 요리조리 확답을 피하고는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독일은 만 6세에 학교를 가기 때문에 장기간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게다가 보는 사람마다 한국이 얼마나 멋진 나라인지 설명하는 한국 덕후 독일 아저씨와 함께 살면서, 올해도 한국을 안 갔다가는 내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남편의 일터에는 이미 3월 말에 한국으로 출발한 독일 모녀팀이 있다. 16살 딸이 Kpop 팬이라서 3주 동안 한국 여행을 한다고 했다. 4월부터 6월 사이에 휴가를 몰빵 했다. 보통 휴가는 애들 방학이 있는 7월 넘어 신청하기 때문에 쉽게 승인이 났다. 나와 아들은 3개월, 남편은 6주를 한국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아이를 한국 유치원에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2년 전 어린이집을 찾을 때와는 달리 만 4세 반에 들어가는 아들의 유치원을 찾는 것은 아주 수월했다. 지난 어린이집 친구들은 몇 명만 빼고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2년 전 대기를 걸어 놓았던 어린이집에서 자리가 났다며 연락을 해 주었다. 어린이집은 단지 안에 있었는데, 통학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너무 작은 놀이터에서 애들이 둘러앉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모래장난을 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친정 엄마는 단설 유치원을 알아보자고 했다. 이미 이번 3월에 멋진 입학식 사진이 올라온 유치원 홈페이지를 보고 과연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무상교육에다, 임용고시를 통과하신 실력 있는 선생님들, 놀이 중심의 알찬 커리큘럼과 실내 운동장까지 다 갖춘 4층 신축 건물을 보며 당연히 자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신도시 엄마들은 여기보단 영유를 선호했다.
입국하고 이틀 후에 유치원에 등원하기로 했다.
한국 유치원에 가려면 정기검진 기록이 필요해 소아과 예약을 했다. 독일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전에 총 9번의 검진을 받는다. 이번에 받는 것은 취학 전 마지막 검사로 아이가 학교를 가기에 충분한 발달이 이루어졌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고 했다. 예전에 다니던 소아과 선생님이 은퇴를 해버리셔서 새로 생긴 소아과로 갔다. 평을 보니 선생님이 좀 까칠하다고 했다.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더니, 아주 젊은 여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청력검사, 시력검사를 했다. 선 그리기, 도형 그리기, 그림을 보고 묘사하기 등의 검사가 있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그림을 본 아이가 말했다.
"여기는 여자 아이가 울고 있어요. 넘어졌나 봐요. 얘 옆에 스쿠터가 있잖아요. 여자 아이가 스쿠터에서 넘어진 게 아닐까요?"
선생님은 아이의 대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왜 그림 속 아이가 우는지를 추론하는 게 훌륭하다며 도치맘을 설레게 하는 멘트를 날렸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선생님의 말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사실, 선생님이 비밀이 있어."
한국말이었다. 입을 벌려 놀라워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K 드라마 팬이라서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웠다고 했다. 언젠가 한국에 가보는 게 꿈이란다.
마지막 검진 질문은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미역국(Seetangsuppe)이요."
이번에는 독일 소아과 선생님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미역국이 산모들이 출산하고 먹는다는 그 거 맞죠?"
너무 신기했다. 세상이 진짜 많이 변했구나. 미역국이 뭔지 설명을 안 해도 되는 시대라니. 국뽕에 차 뿌듯해하는 엄마는 하원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담임 선생님들은 안 계시고, 교실에는 다른 반 유치원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그 선생님에게 아이가 유치원에 출국 전날까지만 나올 거라고 했다.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해서 3개월이라고 했다.
"3개월이요? 어휴, 전 절대 한국에 그렇게 오래는 못 있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 재밌을 거예요. 한국 유치원에도 다닐 거거든요."
"한국 유치원이요? 괜찮겠어요? 거긴 여기랑 좀 많이 다르지 않나요?"
"아뇨? 비슷한데요. 일찍부터 학습을 강조하는 부모들도 있지만, 한국 유치원에서는 놀이도 많이 강조해요."
왠지 기분이 쎄 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연 설명을 했다. 한국 공립 유치원 커리큘럼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얼마나 교육자들의 수준이 높은지, 시설이 얼마나 잘 돼있는지 등등.
"제가 한국 친구가 있는데 걔가 그러던데요. 한국은 노동 환경이 최악이라면서요. 전 그런 나라엔 절대 가고 싶지 않아요. 독일 방송 제작사에서는 1년 걸릴 걸 한국에는 며칠 만에 해야 한다면서요."
아니. 이런. 그 한국 친구가 이 사람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일주일에 60시간도 넘게 일한다는 데 그게 사실이에요? 한국은 저랑은 정말 맞지 않는 나라예요."
나는 한국도 요즘은 노동환경을 개선하려 하고 있다고 얼머부린 채 대화를 끊고 애를 데리고 나왔다. 가본 적도 없는 나라를 멋대로 재단하는 그녀의 무례함이 화가 났다. 꼭 보면 남 깎아내리면서 우월감 느끼는 사람들 있다니깐. 하지만 소아과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K 드라마 노동 환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에 대한 자괴감도 들었다. 십여 년 전 한국 기업을 다니던 시절, 회계 결산이 시작되어 집에 못 가는 날이 계속되자 회의실에 숨어서 엉엉 울면서 친구한테 전화했었는데. 지금도 그러나. 요즘은 달라졌나.
옆에서 내 아이는 독일어 반 한국어 반으로 조잘조잘 유치원 친구들이랑 놀았던 얘기를 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반 정도만 대답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