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외할아버지는 독실하게 성당을 다니셨다. 사람을 좋아하고 신앙심이 투철하시다 보니, 성당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고르넬리오 신자님은 늘 목소리가 크셨지요.”
신부님은 할아버지를 추억하듯이 말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성당을 가본 적은 없었지만, 늘 당당하고 긍정적인 말을 쩌렁쩌렁하게 하시던 할아버지는 과연 성당에서도 어떻게 지내셨을지 훤히 그려졌다.
성당에서 하는 장례는 거의 2시간이 되는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가만히 있는 걸 유독 싫어하는 나인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갔다. 재밌는 점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굉장히 독실한 천주교 신자신데, 두 명의 딸, 두 명의 아들, 4명의 사위 며느리, 그리고 8명의 손자손녀들 중 아무도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우리들이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고 있다. 처음 불러보는 성가를 다들 버벅거리며 불렀다.
왜 사람은 그토록 종교가 필요했을까?
2시간의 시간 동안 나는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지루한 시간 동안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고통받으니 어떤 멍—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차마 보내지 못하는 마음도, ‘그래 이 정도면 보내기 시작할 준비가 되었어’라고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마음에서 보내 줄 준비.
추억을 정말 추억으로밖에 할 수 없는 준비
저수지 같은 마음에 수도꼭지 하나 정도는 열어주는 일.
마음은 물과 같다. 가득 담았으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흘려보내지 않으면 썩고 만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늘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종교는 함께 오랜 시간 고통함으로써 그 손잡이를 찾아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흘려보낼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