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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잠든 집

하워드 카터의 일상, 그리고 그가 남긴 빈자리

by 나그네 한

람세스 5세와 6세의 무덤을 나와,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눈부신 햇빛 아래 왕들의 길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길 위를 혼자 걷고 있었다. 가이드는 없다. 설명도, 정해진 코스도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었다. 아직 서쪽 태양은 하늘 한가운데에 걸려 있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신발 끝은 생각보다 가볍게 모래 위를 눌렀다.


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 왼편으로 낮은 울타리와 흙더미가 엉켜 있는 공간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엔 흔한 발굴지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그곳은 말없이 무너진 어떤 기억의 자리 같았다. 허물어진 벽, 틀어진 돌문, 비스듬히 쓰러진 들보, 그리고 마치 방금 떠난 듯한, 그러나 한참이나 방치된 흔적들. 누군가 여길 파헤쳤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막지 못한 채 두고 간 듯했다.


나는 천천히 그 자리 주위를 돌았다. 특별히 금지된 구역도 아닌 듯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침묵처럼 느껴졌다. 무너진 공간은 대화보다 묵상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마치 “이건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공간 자체가 부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바닥엔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때로는 완전히 깨어진 조각들이었고, 때로는 누구의 손에 의해 꺼내졌다가 다시 흙 속에 놓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반쯤 묻혀 있었다. 언뜻 보면 무질서한 흔적 같지만,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오히려 이질적인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이건 오래 전의 도굴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가 지금도 이 땅을 여전히 존중하며 들여다보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이곳의 발굴은 더 이상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집트 전역에서는 수많은 나라에서 온 고고학자들이 머물고 있다. 이집트 정부의 허가 아래, 그들은 이 오래된 땅에 귀를 기울이고, 붓 하나로 시간을 쓸어내며 천천히 유산을 꺼내고 있다. 그만큼 이집트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땅이다. 파라오들의 무덤이 하나둘 열릴 때마다, 여전히 미라가 발견되고, 무명의 장인들이 남긴 도구와 그림들이 햇빛을 처음 맞는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 땅이 지닌 이야기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이미 다 드러났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에서, 지금도 매년 새로운 유적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은, 단지 과거의 장엄함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가 이 유산을 함께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무너진 자리는 상처가 아니라, 여전히 숨 쉬는 문이었다.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시간들이 이따금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며 말을 건넨다. 그 말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이곳은 침묵이 아니라 대화의 공간이었다.



멤논의 거장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갈라진 얼굴과 부서진 몸을 가진 채로. 하지만 그것은 무너짐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과 침묵을 견뎌낸 자의 표정처럼 느껴졌다. 그 아래, 굳게 다문 입처럼 보이던 땅은 이미 수천 번도 넘게 사람들의 발에 밟혔을 것이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가 지나갔고, 또 멈춰 섰던 자리였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발밑엔 부서진 돌들이 흩어져 있었고, 벽 하나는 오래전 무너져 내린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벽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겠지만, 그 벽이 품었던 시간은 아득히 길었을 것이다. 마치 그 돌과 흙이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듯했다.


“여기엔,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그 속삭임을 들었다. 소리 없는 목소리로. 정리되지 않은 발굴 현장처럼 남겨진 이 공간은, 과거의 혼란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귀 기울임처럼 보였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온 고고학자들이 이 땅을 향해 다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무너진 자리는 상처라기보다는, 여전히 열린 문처럼 보였다.


멤논의 거상은 그 문을 지키는 파수꾼 같았다. 무너진 돌들의 어깨 위로 아스라한 햇살이 내려앉고,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역사는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오늘 나의 발걸음도, 그 긴 시간에 잠깐 스쳐간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멤논의 거상을 지나 왕가의 계곡을 등진 내 걸음은, 조용히 하워드 카터의 집을 향했다. 가이드는 없었고, 발길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이 뜨거운 땅의 먼지와 침묵만이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길은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침묵처럼 이어졌고, 그렇게 걷다가, 나는 한 집 앞에 도착했다.


이 집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었다.

1922년,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비밀처럼 남아 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을 세상에 드러낸 사람, 하워드 카터가 실제로 거주하며 수년간 유물과 기록을 정리했던 곳이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영국 화가 출신의 고고학자였고, 귀족도 아니고 학위도 없었지만, 집요함과 세밀함, 그리고 침묵을 견디는 인내심으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왕의 무덤을 세상에 꺼낸 인물이었다.


그가 이곳에 살았고, 이곳에서 생각하고, 기다렸으며, 마침내 열었던 문 너머로 고대와 현대가 다시 마주했다. 지금 내가 선 이 집의 문턱은, 어쩌면 무덤보다 더 오래 기억될 하나의 ‘발굴의 현장’이었다.


황톳빛 벽, 녹색 나무문,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이어진 복도.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누군가 방금까지 그 안에 머물다 떠난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문지방을 지나자, 나는 한 사람의 시간을 밟고 있는 듯했다. 그 이름, 하워드 카터. 한 세기 전, 이집트 고대왕국의 가장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운 사람. 그가 살았던 이 공간은 단순한 고고학자의 숙소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조용한 연구소, 기록실, 실험실, 그리고 고백의 방 같았다.


첫 방에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책상과 필기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앞에 놓인 낡은 나무 스툴, 지금 막 누군가 앉아 일어나기라도 한 듯, 의자의 따뜻한 곡선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그 위에는 카터의 설명이 적힌 문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새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새장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날지 못한 시간들이, 그의 집 안에 이토록 많이 남아 있다고...


그리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유리장 안에 그가 사용한 대형 카메라와 삼각대, 다양한 필름 장비들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 시대의 정적을 찍어낸 무거운 셔터와, 시간을 담아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긴 기다림을 견뎠을까.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수천 년의 정적 속으로 눈을 맞추던 그 시선이, 이 작은 방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주방 한쪽에는 붉은 흙빛의 물항아리들(zir)이 늘어서 있었고, 벽 선반에는 각종 냄비와 솥, 촛대와 물병들이 바래간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스도 전기도 없던 시절, 그는 기름램프 하나에 의지해 수많은 밤을 보냈을 것이다. 바로 그 램프 아래, 나무 선반과 벽시계가 함께 놓여 있었다. 벽시계는 멈춘 채였다. 어느 시간이 멈추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집 자체가, 그가 이집트를 떠난 순간부터 시간을 멈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서재 한편엔 유리문으로 덮인 책장이 있었다.


붉은색, 청색, 회색 등 무채색 속에서도 오래된 열정이 묻어나는 책들이 줄지어 있었다. 카터는 아마도 매일 이 책장을 열고, 무덤의 지도와 문서를 정리했을 것이다. 그가 앉았을 책상 위엔 타자기와 모자, 잉크병과 확대경이 놓여 있었다.

무덤의 명문을 옮기고, 유물을 분류하고, 점토 조각을 다시 배열하는 모든 순간들… 그의 고고학은 손이 아니라, 삶 전체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침실은 작고 단출했다.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 위에, 작은 찜질용 물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아마 허리나 등을 식히려던 흔적이었겠지... 구부정한 자세로 무덤 속을 드나들다 보면, 어느 날은 뼈마디가 저릴 정도로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서 눈을 감기보다, 고대의 눈을 뜨게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쳤을 것이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는 흑백 사진 하나가 기대어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 아마 동료였을까, 후원자였을까. 아니면 그의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준 그림자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장실...

흙벽 사이, 구멍 하나 뚫린 간이 변기. 한쪽엔 물을 뜨던 대야와 나무 걸이가 있었다. 위생도 편의도 없던 이 작은 공간에서조차, 그는 흔들림 없이 그날의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았던 이 모든 흔적 앞에서 생각했다. 고고학이란, 삽을 드는 일이 아니라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의 발굴은 이미 이 집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먼지 쌓인 책과, 기름램프의 불빛 아래, 하나의 문장이 적히고, 하나의 상자가 정리되며, 고대 이집트는 조금씩 깨어났을 것이다. ‘카터의 손이 닿은 시간’이란, 어쩌면 매일의 반복된 일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을 멈추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집은 바로 그 시간의 결실이었다.







카터의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본 뒤, 나는 다시 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지면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땅속으로 이어지는 짧고 낮은 통로, 그곳은 마치 시간의 목소리가 가장 낮은음으로 들리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묵직한 침묵,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투탕카멘의 무덤을 재현한 공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전시는 어둡고 조용했다. 무덤은 실제보다 작게 모형화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은 작지 않았다.



황금빛 얼굴의 투탕카멘 가면은 그저 부장품이 아니라, 사후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이집트 문명의 상징이 되어 천 년을 넘어선 이. 그는 살아생전보다 죽은 이후 더 많은 눈동자에 비쳤고, 더 많은 입술에 이름을 불렸다.



그를 맞이하는 벽화 속에는 아누비스가 있었다.

죽은 자의 장례를 주관하는 신. 그리고 여신들이 양옆에 서서, 투탕카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손길은 위로였을까, 안내였을까. 나는 잠시 그 벽화를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고대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죽음을 얼마나 조심스레 다루었는지... 이어지는 벽에는 개코원숭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처럼 무릎을 꿇은 채, 벽을 향해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경건하고 진지했다. 그들은 이집트 신화 속에서 시간과 밤을 관찰하는 존재로 여겨졌고, 투탕카멘의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같은 인상으로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침묵과 정적 속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 전시실의 마지막 벽에는 하워드 카터의 연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한 해, 이집트에 처음 도착한 해, 후원자와의 만남, 갈등, 복직, 발굴 허가, 그리고 1922년...

"마침내 무덤을 찾은 날."

그는 단순히 한 무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창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그 타임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발굴한 무덤보다도 더 거대한 유산을 남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왕의 침묵을, 다시 말하게 만든 사람... 나는 벽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눈을 찔렀다. 하지만 그 빛조차도, 투탕카멘의 무덤 안에서 내가 본 황금의 반짝임보다는 희미했다. 그 빛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애 전체가 남긴 마지막 언어처럼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무덤은 왕의 것이지만, 이 기억은 인간의 것이다. 왕의 영원과 인간의 발견이 만나는 자리...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경계선을 조용히 걷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카터의 집 바깥 정원으로 나왔다.

햇살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고, 바람은 잎을 어루만지며 낮게 흘렀다. 초록의 창틀과 부드러운 곡선의 아치형 문이 따뜻한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 현관 앞에 서서 문틈으로 어렴풋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따금 그의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 자신은 그저 한 사람의 조용한 연구자였다는 것을, 이 담담한 외관이 말해주는 듯했다. 정원 가장자리에는 야자수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 길을 카터도 수없이 걸었겠지...


무덤을 발굴하던 날들, 세상이 그의 이름을 외치기 전날, 아니면 그 모든 흥분이 지나간 후의 어느 늦은 오후. 그는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 긴 여정을 돌아보았을까.


아마 그는 알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이 곧, 무언가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무덤은 열렸지만, 침묵은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세상은 투탕카멘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지만, 고대의 진실은 여전히 모서리를 감춘 채, 바람 속에서 흘러 다니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깃든 흙빛 벽, 움직임 없는 문, 그리고 조용히 물결치는 나무들.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깊은 평온이 느껴졌다. 고대와 현대 사이, 죽음과 삶 사이, 영원과 순간 사이... 그가 잠시 쉼을 두었던 자리에 나도 함께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태양은 높고, 길은 조용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오래된 문 하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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