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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아름다운 아침이에요!

한 없이 낭만적인 이집트의 아침 인사들

by 나그네 한 Apr 04. 2025
거리 위에서 일상을 그리는 여성 화가(사진: 나그네 한)거리 위에서 일상을 그리는 여성 화가(사진: 나그네 한)

이집트에서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7년을 넘겼다.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사막 바람을 머금은 탁한 공기,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복잡하게 얽힌 거리의 표정들. 그때는 몰랐다. 이 도시의 낯선 리듬 속에서 내가 매일 아침, 마음을 열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될 줄은.


지금은 이집트의 아침이 참 좋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 사람들과 나누는 그 짧은 아침 인사들이 좋다. 눈 뜨기 무섭게 움직여야 하는 아침, 나의 하루를 활기차게 열어주는 건 꼭 커피 한 잔만은 아니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며 마주치는 얼굴들, 내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오가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가 내 하루를 맑게 만들어준다.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몇 걸음을 옮기다 보면, 내가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 있다. 주스를 파는 가게 앞에서 유리컵을 닦고 있는 아저씨, 길모퉁이에서 '에이쉬'라고 불리는 둥글고 납작한 빵을 굽는 노인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어쩌면 나보다 더 이른 새벽부터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런 피곤한 얼굴 위에 묘하게 빛나는 미소가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마주칠 때면, 이들은 늘 그렇게 인사를 건넨다.


“싸바 헬-키르(صباح الخير). 좋은 아침이에요.”
 그리고 이따금, 더 특별한 표현도 들린다.


“싸바 헬-풀(صباح الفل). 재스민 꽃처럼 아름다운 아침이에요.”


 “싸바 헬-이쉬타(صباح القشطة). 크림처럼 향긋한 아침이에요.”


 “싸바 헬-아쌀(صباح العسل). 꿀처럼 달콤한 아침이에요.”


 “싸바 헬-나나(صباح النعناع). 민트향처럼 상쾌한 아침이에요.”


이 낭만적인 인사들 앞에서 처음엔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 자랐던 나는 이런 말투가 조금 과장되고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슨 아침 인사가 꿀 같고, 꽃 같고, 우유 같아?’ 하는 마음도 들었다. 상상해 보라. 한국에서 누군가 아침 인사로 “꽃 같은 아침 되세요”라고 한다면, 아마 반쯤 웃으며 “뭐야, 갑자기 왜 이래?” 하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막 위에 홀로 핀 작은 꽃나무(사진: 나그네 한)사막 위에 홀로 핀 작은 꽃나무(사진: 나그네 한)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르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어쩌면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필요한 따뜻함을, 그 말들 안에 스스로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주고받는 짧지만 진심 어린 축복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이들은 ‘꽃’이나 ‘우유’, ‘크림’, ‘민트’ 같은 표현을 아침 인사에 쓸까? 단지 아름답고 부드러워서일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이 나라에선 그런 것들이 결코 흔한 게 아니다. 이집트의 90%는 사막이다. 메마른 땅, 가물가물한 하늘. 그래서 이곳 사람들에게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재스민의 향기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반가운지 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 민트 한 잎 띄운 시원한 홍차 한 잔은 생명수와도 같다. 달달한 꿀을 찍어 먹는 아랍식 빵은 고단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위로의 맛이다. 그런 경험이 쌓였기에, 그들은 ‘하루가 꽃처럼 피어나길’ ‘민트처럼 상큼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나는 그들만큼 풍부하게 인사를 건네지 못했지만, 나도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졌다. 짧게라도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인사, 때로는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인사. 그 작은 몸짓 하나에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이 도시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름도, 배경도, 언어도 모르지만,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다.



이집트의 지중해식 식탁 - 아나포라 수도원(나그네 한)이집트의 지중해식 식탁 - 아나포라 수도원(나그네 한)


오늘 아침에는 조금 특별한 일이 있었다. 늘 지나치기만 했던 경찰 아저씨가 갑자기 내 앞을 막았다. 잠시 당황한 나는 가방 안에서 신분증을 찾으려 허둥댔다. 그런데 그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싸바 헬-풀! 아밀레?”

 (재스민 꽃처럼 향기로운 아침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에게 “싸바 헬-노르(밝은 빛 같은 아침 되세요)”라고 대답했을 때, 나도 오늘 아침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나눈다. 낯선 사람과도 눈을 맞추고, 기꺼이 말을 건넨다. 그 짧은 인사 하나가 서로를 연결시킨다. 처음엔 그저 문화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것은 이 땅에서 오래도록 이어진 ‘삶을 환대하는 방식’이었다. 말이 많고, 몸짓이 크고, 감정이 풍부한 이 사람들은 사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이런 환대에 익숙해질수록, 가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아직도 거리에서 한국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면, 무심코 시선을 피하거나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 하지만 이곳에서 배운 인사의 마음은 내게 작은 도전을 준다.


내일 아침에는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볼까.


 “오늘 하루가 민트처럼 상큼하길 바라요.”
 

혹은 “당신의 하루가 꽃처럼 피어나길.”


조금은 쑥스럽겠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 인사를 가장 먼저 필요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버텨내는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작.


오늘 당신의 아침은 어떤 향기로 시작되었나요?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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