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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내성적인*

바람속에서 레몬껍집을 벗겨내고

by 적적

12월 한파주의보가 예고된 밤입니다. 한참 동안 다음 문장을 기다리며 심장처럼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입력되지 못한 말들이 망설이며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거나, 다음 신호를 기다리거나, 또 다른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침이 오는 줄도 서늘한 바람이 씽씽 부는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다른 별에서 온 고양이 모란이 좋아라 하는 바깥공기를 맡게 해 주려고 창문을 조금 열어두려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건…. 돌아와 당황하지 않도록 창문을 닫는 것.


아침부터 마른기침을 하며 눈도 뜨지 못한 남자는 커피 포트에 물부터 올립니다. 마른기침은 계속되고 코드가 뽑혀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립니다. 미안한 마음의 커피 포트가 다른 날보다 물을 빨리 끓여냅니다.



그곳 하늘은 어떤가요?

창가로 너무 먼 하늘만 바라다봐서 그런 걸까요. 아침부터 지독하게 파란 하늘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아요.



산책길에 보았던 달이 예뻤던 건 아니었어요.

이른 아침엔 고개를 잘 들지 않지만, 그 시간에 달을 보면 자꾸 누군가가 떠올랐어요 매번 다른 사람이.

아마도 그래서 아침엔 고개를 들지 않는지도 모르죠.


P는 저보다 두 살 어린 동네 후배였어요.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때 제가 살던 곳에서 공고를 가겠다는 선택을 했었죠 가난한 집안을 빨리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기과를 진학하게 되었죠.


한반도 삐뚤어지지 않았고 바람직한 아이였어요. 그리고 3학년 마지막 학기 때부터 일찍 취업해서 첫 월급으로 형들에게 멋진 저녁을 대접해주고 싶다고 해서 그날은 오랜만에 다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나요.


술집 앞에서 담배연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P는


형 그래도 손은 공고 나온 사람 같지 않죠?


유난히 손이 하얗고 손 매듭도 없던 두 손을 들어 올렸는데 손톱이 유난히 짧았어요.


현장직에서도 인정받아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다는 얘기를 듣곤 하였죠. 몇 번이나 거듭된 이직으로 외근직에서 내근직으로 사무실에 근무하게 되었단 소식도 들려왔어요. 우린 모두 서로의 전쟁터에서 돌아와 화약 냄새를 풍기는 옷을 털어내며 저녁이면 친구 방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어요.


내근직 중 가장 어렸던 P는 결원이 난 현장에 충원되었다가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아무도 그날 P를 찾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도 서로에게 손가락질하거나 서운하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P의 감전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네는 웅성거렸어요.



그 후에도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P의 얘기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고 시간은 삼키지 않아도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입안에 쓴맛을 남기고 사라져 갔어요. 그리고 우리는 P를 조금씩 망각해가고 있었죠.


아니 어떤 슬픔은 마주하기엔 너무 참혹해서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심하게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것처럼. 잠시 기다리기로 했던 것도 같아요.


그러던 늦은 여름 어느 날 노을이 지려고 하늘이 온통 조금씩 어두워지는 그때,


오래전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영문을 알 수 없던 우리는 운동장에 모여서 P의 얘기를 전생의 이야기처럼 하고 있었어요.


자전거 한 대가 운동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건방지게 자전거 핸들도 잡지 않고, 노을을 등지고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 있었죠


자전거를 멍하니 바라다보며 우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단 한 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요.

너무나 열렬한 박수 소리로 다들 손뼉 치던 친구를 바라다보고 있는데 친구가 건방지게 타고 있는 자전거로 달려가 자전거 핸들을 잡자 자전거에서 내린 P를 덥석 안았죠.


P는 동네에서 가장 독하기로 소문난 C에게 찾아가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안장에 어떻게 올라앉을까 하는 문제부터 난관에 부딪힌 P를 두고 C가 돌아섰을 때부터 더 간지 나게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고 했죠.

2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방법을 수정하고 몸에 익혀왔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고 환하게 웃어 보였죠.


붉은 노을이 지는 여름날 저녁. 이제 막 뿌리내리는 어둠 속에서….


소매를 나부껴 팔랑거리며 핸들도 붙들지 않고 자전거가 다시 운동장 한 바퀴를.


모두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자들이지만, 참호도 없이 차디찬 새벽을 견뎌내고 막사로 돌아온 전우에게 우리는 박수를 칠 수밖에 다른 행동은 생각도 나지 않았죠.


거침없이 내성적이었던 몸뚱이를 안아줄 수 있었죠.



*거침없이 내성적인 이자켓 시집 제목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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