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사는 즐거움.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오늘 벌어질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같은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꿈을 꾼 뒤로 갑자기 일상의 변수들을 당황하지 않은 척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산처럼 덩치 큰 친구는 간암 판정을 받은 뒤 가족들에게도 알릴 수 없겠다며 제일 먼저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월말이었고 연말이었으며 미결된 일들로 머릿속의 일거리들이 산처럼 쌓여서 매몰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쉴 수가 없다며.
병원부터 가보라는 말을 건네며 헤어진 기억이 목 안의 가시처럼 거슬렸지만, 시간의 밥 한 덩이를 자꾸 삼키자 이내 일상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친구에게 전화가 왔고 떨리는 숨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바람 부는 날 정신없이 나부끼는 커다란 나뭇잎처럼 말이죠. 가족들 몰래 사채를 쓰고 변제일이 다가오도록 돈 구할 곳이 없는 능력 없는 남자 같았다는 말은 무딘 칼날에 스친 상처처럼 자꾸만 말을 바라보게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땐 한 사람은 슬픔의 경력자여야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일단 뭐든 먹자고 해도 슬픔은 식욕을 떨어뜨리고 서 있는 땅은 뻘밭으로 만들고 다가오는 바람마다 작은 유리 조각을 내던지고 있었습니다.
들을 준비돼 있어 무슨 말이라도 좋아 사람을 죽였더라도 내가 널 숨겨줄게.
설마 죽기야 하겠냐. 제수씨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고 눈물부터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고작 고작 고작의 말들만을 목소릴 들키지 않고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있어? 지금 갈게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야 기다려 거기 그대로 기다려
자정이 가까워질 때쯤 편의점 앞에 가출한 지 얼마 안 된 아이처럼 나를 기다리는 친구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양팔을 벌려 얼싸안고 숨죽여 한숨을 서로 나누고 생수를 사서 둘 다 벌컥이며 쏟아낸 눈물을 마셨습니다.
친구 집으로 같이 가 제수씨에게 친구 상태를 얘기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흐르는 눈물을 삼키느라 아니 아직 어떤 상태인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고개를 들어 눈물을 목 안으로 삼키거나 주변을 둘러보며 그곳이 어디인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쉰 목소리로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걸 오늘 밤은 둘이 꼭 껴안고 자라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오후 늦게 제수씨의 고맙다는 전화를 받고 살려보자고…. 얘기했습니다.
외동딸을 위해 기적처럼 살아난 친구를 기억합니다.
봄이 오기 전 그리고 이듬해 봄까지 모든 항암 치료를 견뎌낸 친구를 기억합니다.
차가운 봄날 아침입니다.
모르고 사는 모든 일 중 가장 빛나는 일들로
함부로 휩쓸려 가기를 희망합니다.
살아있는 그대에게 제가 아는 모든 말들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