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09화

드라이아이스 정원

일상마저 흔들린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by 적적

물 한 컵에도 마음이 쏟아질 때가 있다. 방금 전까지 투명했던 유리컵이 어쩐지 의미심장해지고, 책상 위에 놓인 펜의 방향이 마음에 걸린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조차 이상하게 또렷해져 보인다. 그럴 때면 무엇이든 문장이 된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먼지, 늦은 일요일 오후의 그림자, 바닥에 떨어진 실오라기까지. 일상의 모든 것이 갑자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경이이자 위기다. 어떤 날은 그렇게, 일상이 흔들릴 정도로 쓰여진다.



처음엔 반가운 조짐이다. 침묵하던 세계가 말문을 트고, 일상은 시와 소설의 재료로 탈바꿈한다.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 서로를 향한 미묘한 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동작에서 갑자기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왜 오늘따라 초콜릿을 사 들고 있었을까. 카페 구석 자리에서 울고 있던 여자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언뜻 지나쳤던 풍경들이, 기억이 되기 위한 사인을 보내온다. 말하자면 세계가 지나치게 친절해지는 것이다. 그 친절은 때로 너무 다정해서 아프다.


그런 날은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피막이 얇아져, 바람만 스쳐도 흔들린다. 보통 이를 '감수성이 풍부하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고장 난 감각이다. 세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세계의 모든 징후를 수신해 버리는 상태. 한없이 피로하고 위태롭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이 비일상적으로 보일 때, 눈앞의 현실은 선명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그 선명함은 언제나 무너지려는 전조다.



창밖을 보다 말고 몇 줄 써 내려간다. 의식보다 빠른 문장. 이유 없이. 다만, 지금 이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펜을 쥔 손끝에서 뭔가가 시작된다. 기시감 같은 문장이 나온다. 어제 썼던 것 같기도, 아니면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은 것 같기도 한 문장. 그것은 현실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문장으로 다시 번역한다. 언어는 방어막이다. 동시에 발신기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탱한다.


가끔은 그런 문장들이 너무 유려하게 흘러나와서 두려워진다. 마치 자의식과는 무관하게 어떤 존재가 잠시 들렀다 가는 것처럼. 그럴 때면 잠시 손을 멈춘다. 손끝에서 세상이 흘러나오면, 세상의 온기가 피부에 닿기 시작하면, 이건 나의 언어가 아닌 것 같아진다. 그것은 분명 ‘나’에서 비롯되었지만,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문장은 고백이 아니라 증언에 가까워진다. 그날 본 장면, 들은 소리, 느낀 체온들이 문장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증언은 언제나 피로하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눈은, 결국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감정은 써야 비워지지만, 쓰는 순간에 다시금 선명해진다. 견디기 위해 썼지만, 쓰는 동안 다시 그 안에 갇힌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날의 글쓰기는 구조가 아니라 침몰이다. 쓰면 쓸수록 빠져들고, 빠져들수록 현실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늘 차가워서, 손에 쥐면 다 녹아버린다.



대체 무엇이 그런 날을 불러오는 걸까. 가늠할 수 없다. 날씨 때문인지, 꿈 때문인지, 혹은 아주 오래전 슬픔이 휘발되지 않고 어디선가 떠다니다가 문득 내려앉은 것인지. 이유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런 날은 반드시 오며, 그것은 예고 없이 시작된다. 느끼는 순간엔 이미 늦다. 감각은 열려버렸고, 일상은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면 쓰게 된다. 피하지 못하면 받아 적는다. 살아내는 방식의 하나로, 감각을 기록한다. 온종일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그런 날은, 조심해야 한다. 불쑥 돌아온 감정의 파편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 글에 잠식당한다. 한 줄의 문장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기분. 마치 오랫동안 꾹 눌러왔던 고백이 어느 날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감정의 뚜껑이 열린다. 닫을 수 없다. 그러면 글은 더 이상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부가, 활자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



물론, 그런 날에 쓰여진 문장은 특별하다. 진심이 서투르게 묻어나고, 말이 되지 않는 말이 기적처럼 울림을 가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울고, 누군가는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가장 사적인 문장이 가장 보편적인 울림을 갖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 울림은 대가를 요구한다. 무언가를 내어줘야만 가능한 진동이다. 그래서 쓰고 나면 공허하다. 모든 것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것이 진짜 두려움이다.



그런 날은, 기도하듯 살아야 한다. 무언가에 쓰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밋밋한 시간을 견디기도 한다. 쓰고 싶은 충동이 밀려올 때, 잠시 창밖을 본다. 굳이 적지 않는다. 이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모든 슬픔을 언어화하지 않기 위해. 삶의 어떤 조각은 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남겨져야 하고, 잊혀져야 하며,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그 모든 다짐을 무너뜨리고 글이 흘러나온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빛, 그날의 목소리와 함께. 그럴 때면 또다시, 흔들리는 일상을 조심스럽게 붙잡는다. 문장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해, 문장을 사랑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은, 살아내기 위한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애써 잊지 않기 위해.


월요일아침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해.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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