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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12. 2020

삼신할머니를 모시겠다는 아내

시대가 변해도 아이는 삼신이 돌본다.



아내가 백일 사진을 복고풍으로 사진 한 방만 찍자고 할 때, ‘오 깔끔하고 그게 좋지’ 하고 얼쑤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틀인가 지나서는 “백일상 알아보니까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이건 요렇게 저건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데, 내심 '아 우리 와이프 스케일이면 장난 아닐 듯싶은데...' 걱정이 되어 케이터링 얘기를 슬쩍 꺼내볼까 했으나 “아주 간단하니 걱정 마! 서브만 해^^”단도리를 쳐서 어어하며 그러자고 했다.

백일을 삼사일 남기고서인가. 퇴근해서 거실에 턱 하니 누워있는데 아내 왈,


“삼신상을 차려야겠어.”
“어? 뭘 한다고???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옛날 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 나오는 삼신상을 차리자는 건가? 다시 물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백일상 차리기를 검색하다 보니 삼신상이 나왔다는 거다. 그리고서는 진짜 서울집에 전화해서는 엄마에게 삼신상 차리는 법에 대해 상세히 ‘자문’을 구했다.(실제로 자문이 맞다. 우리 엄마는 경기 중서부 민간신앙의 산 증인이다. 물어보면 다 나온다. 제보자 1순위다.)

일날 동이 트기도 전, 새벽 네시 반. 아내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얼른 씻고 축문 써요."

"어어 그래야지."


아내의 말이 너무 엄중해서 어푸어푸 세수하고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아 준비해둔 문구를 적어 나갔다.


중위경근(重爲輕根)
정위조군(靜爲躁君)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사실 축문이라기보다는 아들에게 주는 덕담이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사는 동안 경거망동하지 말고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


아내는 상차림을 마치고, 아들을 상 앞에 눕혔다. 상을 보니 역시 삼신인지라 미역국과 밥이 세 개 놓여져 있다. 정수 세 그릇에 숙주, 고사리, 시금치 삼색 나물이구나. 엄마 말대로 마늘 안쓰고 일체 가위, 칼을 쓰지 않고 손으로 다듬었구나. 고생했네 우리 아내.


"내가 이 발 잡을 테니까 자기가 애 그쪽 발을 잡아."

"어어."

"자 눈감고 소원 비세요."



절까지 하고 방을 나왔다. 살며시 문을 닫아두고 오분 정도 기다렸다. (그래야 팅커벨처럼 할머니 신이 내려와 아기를 돌보아준다고 한다는 그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요즘 맘들 사이에서 삼신상이 다시금 유행처럼 번지는 듯했다. 아기가 귀해진 시대가 빚어낸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가 태어날 때쯤, 그러니까 대략 40년 전의 이야기다. 엄마 왈, 종로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 사이에 작은 방 하나 차려 놓고 점 봐주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단다. 그분은 말이 점이지 '삼신할머니께 아이 내려받는 일'만 전문적으로 했다 한다.


'수칙과 절차' 음과 같다.


1. 의뢰인은 양 주머니가 반드시 달린 한복 속옷을 사서 착용하고 온다.

2. 쌀 한 되와 장각으로 된 미역줄기를 자르지 말고 그대로 점집에 가져온다.

3. 아주머니는 인적이 드문 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고 쌀과 미역을 그대로 가져온다.

4. 의뢰인은 그 쌀과 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의뢰인 외 절대 아무도 그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5. 의뢰인은 그 옷을 입는 순간부터 미역국을 먹은 다음날까지 옷을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때도 역시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 난임의, 또는 다산의, 혹은 특정의 성별을 원하는 여성들이 그렇게 다녀갔고, 입소문으로 별의별 이야기가 오갔다 한다.


* 미역을 받아 미역국을 차려놓고 잠시 씻으러 간 사이, 옆 집  애엄마가 놀러 와 그 미역국을 한 입 먼저 먹었더니 내 애는 안 생기고 저 집 애가 바로 생기더라.

* 미역을 받아 미역국을 차려놓고 밖의 문 닫는다고 나간 사이, 쌍둥이 딸이 그 사이에 미역국을 먹고 있더란다. 점집 아주머니에게 찾아가 고하니 '그 애들 죽지 않은 게 기적이다' 했단다.

* 딸 가질 모양으로 미역 받아 국을 먹는데, 마침 남편이 있어 나눠 주었더니 아들 쌍둥이를 낳았단다.


뭐 진짠지 가짠지 내가 알 길은 없다만 예약제로 받을 정도로 사람들이 미어터졌다고 하니 '신박한' 양반임은 분명했던 모양이다.


이쿵저쿵간에, 아내 말대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태어난 생명에 대해 경건함을 보탠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어떤 선한 힘이 이로 인해 아이에게 닿는다면 얼마나 감복할 일인가 숙연해진다. 아들을 들쳐 안고 그 보드라운 볼살에 얼굴을 부벼본다. 꺄르르 웃는다.


동이 트고, 우리 미역국을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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