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7년 차 며느리의 설... 그 후
육체노동만으로도 늘 녹초가 되는 며느리의 명절. 감정노동까지 하지는 말자. 설을 며칠 앞두고 컴퓨터에 앉아 차분히 브런치에 글을 쓰며 다짐했다. 아이가 없어서 시댁의 친척 어른들에게 늘 훈계를 듣는 우리. 자발적으로 선택한 우리의 아이 없는 삶은 친척 어른들 앞에서 늘 부정당한다. 이번에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 무례한 말을 하거나 불평등한 노동을 강요할 때 그 상황과 내 마음이 힘들면 참지 말자. 감정을 제때 해소하지 못해 몇 달씩 끌어안고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감정을 터뜨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 가장 편안하고 뒤끝 없으며 후회 없는 방법이 바로 울어버리는 거니까.
결론적으로 시아버지의 큰집에서 전을 부치며 보낸 1박 2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울 일이 없었다. 이번에 아무도 내게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무례한 말이나 훈계를 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들었던 말인데 이제 7년 차가 되니 어른들도 지쳤나 보다. 이번엔 시댁의 큰집에 대소사가 많아서 나한테까지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은 딱 그 정도다.
결혼 후 매년 시댁의 큰집에서 보내는 1박 2일의 명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렵고 불편하고 낯설고 힘들지만 늘 날 괴롭히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덕담으로 내 마음이 훈훈해졌던 순간도 있었고 이번 명절처럼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던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난 왜 매번 명절이 괴로울까.
결혼 전 우리 집에선 엄마와 아빠, 나, 언니, 오빠 이렇게 간단히 명절을 보냈다. 모두 일하느라 바빠 차례상은 간소했고 다들 잘 안 먹는 약과나 산자 대신 초코칩 쿠키와 롤 케이크가 올라갔다(할아버지도 좋아하는 간식이었다고 한다). 차례상은 간소해도 아빠는 할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며 어떤 분이셨는지, 우릴 얼마나 예뻐했는지 늘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에 대한 아무 기억도 없지만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내 몸에 희미하게 흐르는 핏줄의 의미를 느꼈다.
내가 30년 동안 겪어온 우리 집 명절 풍경과 달리 시댁은 시아버지의 큰집에 온 친척들이 모두 모여 다 같이 차례를 지내는 시스템인데 그 인원 수가 30명이 넘는다. 작은 시골집에 수많은 사람들이 꽉꽉 차게 모인 풍경보다 놀라운 것은 차례가 2분 만에 끝나는 것이었다(정확히 1분 49초. 이번에 재봤다). 차례상 준비에는 꼬박 1박 2일이 걸리는데. 아무도 할아버지나 할머니, 윗세대들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남편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른다. 그런데 남편도 모른다고 한다.
1박 2일 동안 아픈 무릎과 허리를 부여잡고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한 결과가 바로 이 2분을 위해서인가. 남편은 잘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며 무슨 생각을 할까. 꼭 지켜져야만 하는 전통과 가풍이 이런 것인가.
7년 동안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며 육체적, 감정적인 고충보다 더 날 힘들게 했던 건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로 끊임없이 구덩이를 파고, 다시 메꾸는 것을 반복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무의미한 삽질을 반복해서 하는 것. 인간에게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우리에게 명절을 의미있게 보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이유가 또 있다. 대를 잇고 자자손손 차례를 지내야만 명절을 잘 보내는 것이라면 딩크족이라 후세가 없는 우리에겐 이미 불가능이 예정된 일이다. 아무리 효심이 지극하고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고 해도 말이다.
결혼 후 몇 년간의 명절을 보내며 남편과 숱하게 싸웠다. 너무 다른 문화에 적응 못하는 나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명절을 보낸 남편. 남편도 태어나면서부터 접해온 명절 풍경이 전혀 즐겁지 않고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건 알지만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반기를 들자 본인의 역사와 뿌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며 상처를 받았고 화를 냈다. 명절 전이면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크게 싸우다가 처참한 기분으로 명절을 보내기 일쑤였다. 평소 찰떡같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이날만큼은 남의 편이었다.
차도 없고 길도 안 좋았던 옛날, 명절이면 어떨 땐 12시간, 심하면 1박 2일이 꼬박 걸렸다는 시부모님의 귀성길. 그래도 시부모님은 명절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좋든 싫든, 자연재해가 있어도,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조기 퇴원을 해서 무조건 큰집에 가셨다고 한다.
'큰집에서 지내는 차례는 하늘이 두쪽 나도 참석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시아버지도 매년 너무 고생스럽고 형제들끼리 늦게 왔네, 빨리 왔네 하면서 싸우는 게 지긋지긋해서 명절이 아예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즐겁든 아니든 어쨌든 명절이 사라지지 않는 한 큰집의 차례에 참석한다는 것이 시부모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도 섣불리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만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나와 시부모님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해 남편도 무척 괴로워했다.
그러다 명절 전후에 늘 고뇌로 가득한 내게 남편이 '명절왕 제도'라는 고육지책을 내밀었다. 1박 2일 동안 시댁에서 무사히 명절을 보내고 난 뒤 남은 연휴와 주말까지 나는 명절왕이 되고 남편은 왕을 모시는 내시가 되어 내 소원을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이다.
7년 동안 명절이면 무수히 출구 없는 다툼의 나날을 보내고 밤을 꼬박 새우는 대화를 한 끝에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큰집에서 지내는 명절의 방식을 당장 깡그리 뜯어고치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사촌 형들의 구시대적 정신상태를 개조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당장 명절과 차례를 거부하고 불참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내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위로, 그리고 친척 어른들의 무례한 말로부터 남편이 날 적극 보호해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이런 명절 말고 좀 더 의미 있는 명절을 위해 같이 고민하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남편도 적극 동감했다.
명절왕 제도는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 명절을 잘 보내고 나면 내게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니까. 의미가 생겼다. 남편이 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인 공감을 해 준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다.
첫 번째 명절왕 소원으로 '일출 보기'를 택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희망찬 기운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나. 남편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함께 일출을 보는 장면을 꿈꿨다. 하지만 남편은 휴일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아주 싫어해 아무리 졸라도 늘 단칼에 거절했었다. 하지만 왕이 원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내시에겐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따뜻한 수프와 커피를 끓이고 해 뜨길 기다리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명절에 느꼈던 답답한 기분이 해소됐다. 내가 즐거워하니 남편도 안도했다. 명절이 큰 다툼없이 무난히 지나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힘들고 격렬한 운동을 꾹 참고 끝내면 시원한 맥주 맛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또 이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여전히 사막처럼 척박한 나의 명절. 그래도 오아시스가 생겼다.
이번 추석엔 남편에게 무슨 소원을 말해볼까. 괴롭기만 했던 명절에 아주 조금은 기다려볼 만한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