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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호 Nov 13. 2019

그립다 말을 하면 견딜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가난한 만큼 돌아가야 했던 좁은 골목길을 걷습니다. 모퉁이를 돌자 다정한 당신의 가득한 미소가 나를 반깁니다. 우리의 재회엔 거창한 인사가 필요치 않죠.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잠시 마실 다녀온 것처럼, 잠깐의 미소면 충분합니다. 당신 곁에 내가 살지 않았다 하여도 내 곁에 당신이 살았습니다. 두 잔의 찻값을 치르고 주저앉아 마치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을 말합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이 몹시도 소란스러웠노라고. 그 정겨움이 좋았다고. 저기 파란 지붕 아래 사는 꼬마 녀석이 오래도록 걸음을 붙잡아 시간이 걸렸노라고. 내일 다시 붙잡혀 볼 요량이라고.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뭘 먹지? 하고 말입니다.









눈을 뜨면 어두운 방, 좁은 침대 위를 홀로 뒤척입니다. 아무 말 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고 떠돌다 돌아오면, 당신과 닿아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머문 곳에 우기가 찾아와 눅눅하게 젖은 이불을 털어내고 있어도, 나는 찌는 듯한 태양 아래를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둥그런 담소를 나누고 있어도, 나는 당신과 상관없이 네모난 모니터 속의 열 맞춘 언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바라본 당신의 하루는 우리의 거리만큼 멉니다. 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에 눈을 감아도, 당신 곁에서 잠들 수는 없습니다.


텅 빈 나를 채워주던 당신의 따스한 눈빛이 그립습니다. 허기진 내게 건네어졌던 당신의 도시락, 허둥대던 나를 붙잡아주던 당신의 손짓, 한가한 나를 뛰놀게 하던 당신의 아이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어둠처럼 내리던 당신의 눈물이 그립습니다. 시선을 가만히 둘 수 없던 낯선 거리의 번잡함, 수없이 마주했던 갈림길, 끝을 알 수 없던 방황의 걸음, 그 순간 초라했던 내 마음마저 그립습니다. 그 길의 끝에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그리움을 삼키면 나는 당신을 앓습니다.









그래요. 이것은 나의 미련. 손을 뻗어도 가 닿을 리 없는 혼자만의 미련. 하지만 미련한 그리움도 끝을 모른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 아닐까요? 속으로만 품고 있던 당신의 얼굴을 꺼냅니다. 당신과 걷던 거리를 매일 오가는 길 위에 펼쳐 봅니다. 문을 열고 인사를 건냅니다. 당신이 어디에도 사는 이유로 문득 그리움이 차오르면 고요한 일상이 파도칠 것을 알아요. 그러나 더 이상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립다고 말을 하면 견딜 만 할거에요.


그립다는 말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수줍던 누군가 사랑 대신 남겨둔, 자신의 사랑을 흔한 말로 적어두고 싶지 않아 새겨둔, 사랑입니다. 나의 그리움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음을 알겠습니다. 사랑엔 이유가 없으니. 이제야 서툰 그리움을 이해했습니다. 이 그리움의 끝이 없으리라는 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나의 그리움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연(緣)이라면, 우린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립다는 나의 말도 언젠가 당신의 두 뺨에 닿겠죠. 부디 따뜻하기를. 바람은 그친 적이 없으니 당신의 숨도 내게 불어올 것입니다. 당신의 바람에 이끌린 나는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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