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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Oct 17. 2024

눈을 뜨니 온통 푸른빛

저기 제일 끝 방이 우리 가족이 묶었던 방. 고양이가 내내 문밖에 있어 나는 살짝 무서웠다.
0.5박 숙소로 선택한 아미한 리조트, 바로 옆 바탈라 리조트의 수영장도 사용할 수 있어 가성비가 넘친다

새소리에 눈을 뜨니 온통 푸른빛이었다.


이 문장을 써놓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조금 비현실적인 듯하여 여기에 어떠한 과장이 있진 않을까, 곰곰이 살펴보았다. 턱을 괴고 '음...' 하며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확실히 이 문장 그대로가 맞다. 작고 부지런한 새소리가 들려왔고 커튼 사이로 환한 햇살이 밀려들어 피곤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먼저 잠에서 깨었던 것인지 문이 살짝 열려 있길래 여닫이 문을 밀고 나갔더니 초록빛이 가득한 정원에선 바람이 일고 있었고 그 너머의 파란빛이 가득한 수영장에선 아침 햇살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와, 온통 푸르네. 우리, 진짜로 떠나 온 거네?"

이미 앞마당에 서서 공기가 좋다며 감탄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잔뜩 들뜬 환호를 내질렀다.


바로 전날 퇴근을 하자마자 미리 싸놓은 여행가방을 끌고 공항으로 갔다. 30분 정도 연착이 있었고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내내 난기류에 흔들리긴 했지만 밤비행기는 무사히 우리를 낯선 땅에 내려놓았다. 비슷한 기후를 작년에 한번 겪었기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졌던 공기의 습함과 눅진함도 이전보단 정겨웠다. 오히려 조금은 그리워했던 건가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팡라오 공항(보홀)도 카티클란 공항(보라카이)만큼이나 작았다.

"여기도 작고 귀엽네."

"확실히, 공항 같아 보이진 않네. 버스정류장 같아."

캐리어 바퀴를 굴려가며 밖으로 나가 미리 예약해 둔 픽업 차량에 올라탔다. 0.5박(보홀행 비행기는 보통 새벽 비행기라, 도착 첫날 잠만 잘 용도의 가성비 숙소가 꽤 있다)을 위한 숙소로 향했고 짐을 내려놓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리곤 새소리에 잠이 깨어 온통 푸르른 빛을 마주한 아침이었다.

바탈라 리조트, 분위기가 너무 좋아 이 곳에서 몇일 지내도 괜찮겠다 싶었다.

처음부터 보홀 여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작년에 다녀왔던 보라카이가 너무 그리워 다시 그곳에 갈 계획이었는데 여전히 직항이 없었던 것이다. 마닐라를 경유하여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갔던 일정이 꽤나 힘들었기에 몇 달간 운항 스케줄을 살펴봤지만 보라카이행 비행기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보홀행 비행기는 늘어나고 있었다.

"보라카이 가는 비행기가 없어. 보홀 가는 비행기는 매일 같이 뜨는데 보라카이는 일주일에 한 번도 뜨지 않아."

내가 투덜대고 있으려니 남편이 말했다.

"그럼 직항을 타고 보홀에 갔다가 보라카이로 갈까? 어차피 경유를 해야 하는 거라면 보홀로 가면 되지."


오잉! 뭐지? 이 무성의한 헛소리는? 무지하게 멍청한 소린데...... 이상하게 맞는 말 같잖아?

정말 가고 싶다면, 비행기가 뜨는 방향으로 날아가면 되는 거였다. 가끔 남편은 나의 기나긴 고민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툭툭 짧고 심드렁한 답을 던지는데 어이없게도 그게 답이  때가 있다. 진지하게 고민했던 나의 시간과 노력이 억울하고 짜증 나서, 게다가  그런  그렇게까지 고민하느냐는 남편의 표정이 맘에  들어서, 남편을 향해 한껏 ' 소리야? 개코도 모르면서?'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미간을 좁혔지만 이번에도(역시나 우연하게도) 남편 말이 맞는  같았다. 가끔은 궁금해한다. 어째서 나한텐 모든 문제가  예민하고 복잡할까. 어쩌자고 남편한텐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문제일까. 우리의 다름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삶이 단순하면 무언가 많이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어쨌든, 남편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 때문에 보홀행 항공권을 구매하게 되고 일주일의 보라카이 여행에 일주일의 보홀 여행이 더해져 이 주간의 여정이 꾸려지게 되었다. 다행히 10월 초에 휴일이 많아서 휴가 내기가 쉬웠다. 늘어난 여행 비용은 어떻게든 가성비로 커버해 보리라 다짐하며 라면과 햇반, 통조림 김치 등을 잔뜩 챙겨서 떠난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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