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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홍 Oct 02. 2021

오!늘 사진 [23] 내 안에 인형 <2>

유치한(Childish) 어른 VS 동심(Childlike)을 지닌 어른

현대인은 생명력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참다운 창조적인 삶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대신 걱정하는 기계로 전락해버렸다. [프리츠 펄스]
기억 속 문중 제각과 비슷 : 정윤섭(오마이뉴스 연재기사 중 한천동 영모당)

산밭 근처 산 아래 문중 제각이 있었다. 

빨강(양 : 남성) 파랑(음 : 여성)이 역동적인 태세로 아물려 커다란 원을 이룬

태극문양이 박힌 대문 건물을 지나면 두 채의 한옥 건물이 있었다.

하나는 마당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마당보다 높은 터 위에 자리 잡아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어린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굵은 기둥과 넓은 마루에 밝은 갈색 페인트가 정갈하게 칠해져 있었는데 

그 위에 니스를 칠해서 유리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기억 속 제각 태극 대문과 비슷 : 네이버 블로그 엄짱

제각 안에 거주하는 제지기의 관리로 평소엔 문이 꽉 닫혀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는 쇠사슬이 쳐지기도 했는데 어쩌다 친구들과 놀다가 그 태극 대문 앞에 서면

"들은 가라! 들은 가."

라며 선명한 빨강파랑 눈을 가진 문지기 괴물처럼 버티고 서서 우리의 통행을 막아 세웠다. 

어린 마음에 무서운 곳이면서도 신비한 곳이었다.   

하지만 문중 시제가 있어 부모님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갈 때만큼은 

부릅떴던 태극 눈알이 홍해 바다처럼 반으로 쫘악! 갈라져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출입을 허용했다.


문중 시제를 제외하면 평소엔 '큰 집'으로 불렀던 큰 아버지 댁에서 제사를 지냈다.

유교의 산물인 제사만큼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이 있을까...


큰 집을 중심으로 동네에 아빠의 4형제가 흩어져 일가친척을 이루었는데,

대대로 내려온 유교 전통을 따라 1년이면 서너 차례 제사를 지냈다.


큰 집 마당에서 돼지를 잡기도 하고...

명절 잔치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와 평소엔 맛볼 수 없는 풍성한 음식들,

붉은 팥떡과 노란 콩시루 떡은 기본이고, 어느 해엔 층층이 고운 색깔을 물들인 무지개떡...

커다란 빨판이 징그러웠던 문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상어, 네모난 모양이 웃겼던 홍어 등등 

볼거리만으로도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설레고 좋았는지... 제삿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좋았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밤 12시까지 졸린 눈을 비비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제사드리기를 기다렸는데...
정작 제사의 핵심인 조상께 절하는 의례에
여자들은 낄 수가 없었다.
네이버 블로그 여행박사
제삿날이 가까우면...
큰어머니와 2명의 작은 어머니들과 엄마는 며칠 전부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셨다.
큰 집에 모인 네 명의 어머니들이 광에 보관했던 놋그릇들을 산처럼 쌓아놓고,
볏짚에 양잿물을 묻혀 닦으면서 제사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렇게 며칠 동안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재료를 준비하고...
제사 당일에는 새벽부터 부엌과 마당에 걸린 솥을 오가며 쉴 틈 없이 제사상을 차려냈는데...

왜 여자들은 제사를 못 드릴까?

남자 어른들 심지어 어린 아들들도 넙죽 절하며 제사 지내는데...

어른 어머니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 뒤에 병풍처럼 둘러서서,

주인공이 아니라 풍경으로 소외되는 모습이 어린 눈에 너무 이상하고 싫었다.


친척 아버지들과 친척 어머니들은 어린 내게 다정하고 친절하셨지만,

나 역시 딸이라는 이유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아! 이 세상은 여자가 살기엔 불리하구나...
그렇게 어린 마음에 새겨진 박탈감은 의식적으로 나의 여성성을 억압했고,
무의식적으로 사내아이를 동경하였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를 상징하는 인형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것이...

상처 입은 내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연인, 부부, 부모 자녀, 형제 및 대인 관계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어른이 철부지처럼 유치하게 굴고 떼쓰며,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관계를 망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알코올을 비롯해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지는 등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면서 건강한 삶을 방해한다.

존 브래드쇼 <상처 받은 내면 아이 치유> 참조.
휴게소 인형 : 사진 by연홍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성찰하지 못해 잃은 것들...

1) 내 경우엔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고등학생 때 짧은 쇼트커트에 청바지와 점퍼를 즐겨 입는 영락없는 선머슴아 모습이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잠깐이긴 했지만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2) 유아적인 소유와 집착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사랑했던 친구를 잃었다.  

그때는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통해 소통하지 못하고,

끝까지 어린아이식 떼쓰기로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서 친구에게 큰 상처를 줬다.


3) 어릴 땐 그렇게 잘 놀았는데 사춘기 때부터였을까...

노는 게 힘들었다. 특히 노래방!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간 노래방은 그냥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었다.

간을 빼놓고 용궁에 간 토끼처럼, 제정신을 빼놓고 가야만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억눌려 있었기에...
춤과 노래가 괴로웠고
인생을 즐긴다! 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휴게소 인형 : 사진 by연홍

어린 아이다운(Childlike) 어른

내면 아이(Inner Child)는 동전의 양면 같다.

“아이는 버림받고 위험에 노출된 존재인 동시에 신성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라는 칼 융의 고찰은 백번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무시당하고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성찰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내면 아이가 어린 아이다운(Childlike)
또는 동심(童心) 같은 긍정의 방식으로 발휘된다면 어떨까?
어른 안에 곱게 간직된 동심은 삶에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회복시킨다.
온갖 걱정과 불안에 짓눌린 현대인에게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즐기며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삶으로 자신과 주변을 가꾸게 한다.

자신 안에 깃든 때 묻지 않은 신성을 깨닫고 표출하면서
'본래의 나'로 여유와 자유함을 누리며 살게 하지 않을는지...
휴게소 인형들이 마치 어른 안에 잠들어 있는 내면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 사진 by연홍
휴게소 인형 코너에서 내게 말을 걸어온
내 안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처음으로 가장 예쁜 인형을 선물해줬다.


인형을 손에 든 어른 여자인 내가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행인 어른들에게 인형을 보여주며 들뜬 목소리로 자랑질을 했다...

휴게소 인형 : 사진 by연홍
휴게소 인형 : 사진 by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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