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회사에 말했다
남편이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했다.
드디어 그 말을 하는 날이 오는구나. 퇴사 퇴사 노래를 불렀던 건 나인데, 남편이 한 발 앞서 질렀다.
지난번 남편이 내게 퇴사와 이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어려운 점을 말하고, 그래서 이직을 하려고 한다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사실 속으로 너무 신이 났다. 철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퇴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꺄르르 웃음이 나는 직장인이기 때문일까. 남편이 내가 못하고 있는 퇴사를 대신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간 남편이 직장 생활을 하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과 집의 거리가 아주 멀어지는 바람에 매일 편도 1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 길을 1년 넘게 다니고 있다. 결혼 전엔 직장 가까이 집을 구해서 출퇴근이 자차로 고작 15분 컷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3시간 가량을 도로에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옥 같은 출근길을 뚫고 가서 일하고, 야근도 하고, 가끔 밤을 새우기도 했다.
남편의 회사는 큰 규모가 아니다. 전 직원 20명 남짓의 스타트업 회사이다. 남편이 입사하던 약 4년 전에는 남편이 7번째로 입사한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직원이 2배 이상 늘어났다. 본인 위로 상사가 몇 안되고 후임이 많다는 건 어쩌면 좋은 상황일 수 있다. 그만큼 눈치 볼 사람이 적고, 일을 시킬 사람은 많다는 거니까. 하지만 그만큼 업무도 2배 가까이 늘었다.
IT 인력을 뽑기 어려운 지방에서 좋은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데려와서 키우자 라는 모토로 신입들을 뽑았지만 사람을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거기다 회사의 규모가 급속하게 커지다 보니 새로 들어오는 인원은 많은데 그들을 관리할 시스템은 미흡했다. 결국 사람은 사람대로 가르쳐야 하고, 일은 일대로 쳐내야 하는 이중고가 생긴 것 같다. 계속해서 새롭게 들어오는 신입들과, 새롭게 밀려오는 업무 속에서 점점 더 가중되는 자신의 몫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을 남편이다.
남편은 평소 힘들거나 어렵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서 꾸욱 버티거나 감내해오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낄 때 '결단'을 하는 사람이다. 결혼 초 자신의 감정을 세세하게 잘 표현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낀 경우가 더러 있어서, 어렵고 힘들 때는 혼자서만 삼키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달라 한 적도 있다. 그런 남편이 드디어 퇴사하겠다는 말을 했다.
내가 남편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회사 생활이 너무 지치고 힘들면 괜히 엄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그만두라고.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든, 다른 공부를 하든 충분히 다른 선택권이 있으니,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회사를 포기하라고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보기에 더욱이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더불어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편이 평소 책임감이 없던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런 말을 못 했을 거다. 그만큼 남편을 믿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점을 알기에 힘들 때는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다. 서로에게 서로가 그런 존재이길 바라기에.
그래서 열렬한 축하와 환대로 남편의 퇴사를 지지해주었다. 퇴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는 벌써 퇴사 파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연말에 퇴사 기념 여행이라도 가볼까. 퇴사하고 이직하기 전에 남편에게 겨울 방학을 줄까. 그러고 보니 직장인은 방학이 없잖아! 길어야 일주일 남짓의 여름휴가를 제외하고는.'
그래 겨울 방학을 주자. 약 한 달 정도..? 혹시나 새로운 직장이 잘 안 구해진다 해도 초조해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직장생활 스트레스를 벗어던지고 재충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이름하야 남편의 겨울방학. 퇴사 당사자인 남편보다 더욱 신이 난 나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회사에서 꽤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남편이 왜 힘들어하는지, 왜 그만두려고 하는지 이유를 듣고는 그에 맞는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 회사가 있다니. 남편이 내심 부러웠다. 공무원 조직도 누군가 그만두겠다 하면 일단 잡긴 잡는다. 사람이 나가면 충원할 인력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잡아둔다 해도 대안은 없다. 알아서 살아남는 것뿐.
남편은 며칠 고민하더니 회사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꽤 좋은 제안이기에 일단 한 번 해보기로. 덕분에 퇴사 여행과 겨울방학이라는 나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