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을 무자비하게 살해해서 배고픔을 채우는 사람은 과연 자비를 베풀까
나는 오늘 아침에도 폭력범이었다
동식물을 무자비하게 살해해서 배고픔을 채우는 사람은 과연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
나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이른 봄부터 콩은 천둥과 번개를 맞고
가을의 햇살을 기다리다
자기 몸을 갈아 두유 한 잔을 만들었다.
미세먼지도 물리치고
이른 봄 새순에 담은 가을의 결실을
성실하게 담아낸 딸기와 블루베리,
제철을 잊고 철없이 아무 때나
양산되는 과일을 먹으며 철없이 지내는 사람들,
그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받아내지 않을 수 없다.
식물학적으로 채소지만
요리재료상으로는 과일이라고 우기는 토마토,
척박한 땅에서 간신히 물 한 모금 마시며
겨우내 추위에 움츠린 채
내 앞에서 붉게 익어가다 붙잡혀온 토마토 한 개
칼로 베여서 요거트에 빠져 죽는다.
수시로 다가서는 새들의 침범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바람의 심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 저미는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밖의 괴로움을 안으로 삭히다 빨갛게 변한
사과가 칼로 벗겨지는 껍질의 아픔을 뒤로한 채
칼로 베인 상처를 드러낸 파인 애플과
옆집 바나나가 함께 뒤엉켜 달려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멀리 필리핀 여름 햇살에 나잇살 먹으며
푸르른 청춘 다 보내고 노랗게 바뀌는
황혼의 서글픔이 지니는 무게가
파도를 헤치며 당도했을 배에 실려
낯선 공간에서 추위에 떨다
지금 이 순간은 나의 배로 들어간다.
살아가며 생긴 시름의 흔적을
안의 주름으로 바꿔낸 호두라는 이름,
죽을(die) 고비를 넘기며 다이아몬드(diamond)보다
더 단단한 견과류로 탄생한 아몬드를 비롯,
저마다의 견과류가 우유로 발효시킨 요거트 품속에 뛰어들어
뒤범벅이 되는 순간, 입으로 들어가며 부서져버린
삶의 최후 순간을 누가 기억하랴.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자연과 우주의 기운을 먹고 자란
현미와 귀리, 병아리콩과 보리 곡물이
올리브 오일과 약간의 황설탕과 소금으로 뒤범벅되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들들 볶아져
차가운 요거트의 바다로 뛰어들다 다시 익사당하며
알몸인 채 숟가락에 뒤섞이며 최후의 만찬장을 기다린다.
아삭하고 상큼한 제주의 맛을 전하기 위해
보랏빛 외투로 무장한 콜라비도
무자비한 칼로 무장해제 당하며
조각난 채 입맛을 더하고,
어둠과 벗이 되어 땅 속에서 버티며
자기만의 색으로 버티다 뿌리째 뽑혀
직선의 하소연으로 올리브오일에 저려진 당근도
최후의 한 순간을 기다린다.
달걀 하나 낳기 위해
너른 들판 포기하고
좁은 영토 안에서
숨죽이며 주인이 주는 사료 얻어먹고
사육된 닭이 품었을 한 많은 세월의 아픔이
오늘 아침 식탁에 오른 삶은 계란에게 전해져
삶은 계란이 아니라 고행임을 깨달아봐야 무얼 할까.
꽃 세움 바람으로 이른 봄부터 뿌리를 다지고,
폭우와 천둥, 그리고 번개로 여름에 놀란 가슴 부여잡으며,
따가운 가을 햇살을 몸으로 삭혀
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운을 전해준
동물과 식물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폭력범이
오늘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배고픈 위만 채운다.
나는 오늘도 한 끼 아침 식사를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던
각양각색의 동물과 식물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폭력을 가하고 살인행위를 저지르며
배고픔만 채우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 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운명이다(146쪽).”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한 말이
왜 지금 이 아침에 온몸을 파고들며
죽비처럼 내리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