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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을 짜다가 퇴사를 결정했다

치약이 너무 말라있어서 

치약 뚜껑이 닫히질 않는다. 

축축한 욕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은 여름에는 에어컨, 겨울에는 히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이다. 게다가 내 자리는 창문 옆. 하루 사이에 치약 입구 쪽에 묻은 치약이 말라버렸다. 마른 치약은 딱딱했고, 뚜껑을 거부했다. 생각 없이 뚜껑을 걸쳐 닫아뒀더니, 다음 날은 많은 치약이 말라 붙어 있었고, 더욱 뚜껑을 거부했다. 


그 사이 치약을 짜는 입구 안 쪽에서도 치약이 마르기 시작했다. 구멍은 서서히 좁아졌고 치약은 가느다란 고추냉이 같았다가 지금은 오랜만에 사물함에서 꺼낸 물감처럼, 잘 나오질 않는다. 


나는 치약을 그냥 연필꽂이에 꽂아 놓는다. 화장실에 가서 마른 치약을 걷어내고 물로 입구를 씻을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냥 꽂아 두기로 한다. 내 회사 생활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막힌 것은 나일까, 치약일까. 뚫어야 하는 것은 삶의 의지일까, 적응하려는 마음일까.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이제 퇴사를 하면 다시는 사무직을 못할지도 모른다. 나이와 경력을 생각했을 때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럼에도 무모한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결국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나는 뭐든 할 것이다. 남의 집 청소도 좋고, 식당 서빙도 좋다. 하지만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는 않다. 


마른 치약이 '이제 관둬 제발 관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말라비틀어졌으니 제발 집으로 돌아가.' 


그렇다. 나는 치약을 짜다가, 그 좁은 입구로 기어 나오는 치약을 보다가, 퇴사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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