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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toria Apr 11. 2021

태양이 머물던 곳

Ranya Paasonen, Auringon asema (2002)

시어머니의 텃밭에서 나는 유기농 감자는 아주 작다. 체구가 작은 내 손바닥의 반에도 안 차는 감자를 보고 있노라면 농약도 품종개량도 없던 시절 기원전 남미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에서 사흘을 쫄쫄 굶다 우연히 캐낸 야생 감자를 보고 '간에 기별도 안 가겠구먼, 하지만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지'하고 자조했을 원시인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을 것 같은 작고 동그란 조약돌 같은 감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려 본다. 실은 마늘도, 양파도 크기가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여름에 반짝 빛나는 햇빛과 서늘한 기후 속에서 열심히 속을 채워 온 소박한 농작물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뜻한 남쪽 나라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수박은 아픈 딸의 얼굴처럼 창백했고 그 씨앗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라냐 파소넨의 자전적 소설 'Auringon asema'(The Position of the Sun)핀란드에 온 이집트인 아버지 이스마엘이 문화충격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핀란드의 가게에선 야채를 씻어 비닐봉지에 담아 팔고, 흥정을 하지도 않는다. 지도에 없는 길도 없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언어인 핀란드어로 말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인 아이들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남자 이스마엘과 핀란드 여자 아누 이집트의 룩소르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났다. 적지 않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한 이스마엘의 적극적인 구애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두 딸을 낳고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화책 속 결말과는 다른 많은 문화적 충돌과 고통, 인내가 있다. 아이들이 자랄 수록 작아지는 부모의 자리까지도. 수처리 엔지니어인 이스마엘을 따라 이집트,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살던 가족은 아누의 나라인 핀란드로 향하지만, 이스마엘은 거기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이스마엘과 아누의 딸인 화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시적인 텍스트는 어머니가 떠난 후 외로워하는 화자의 현재와 부모님이 처음 만난 마법과 같은 과거의 순간 사이를 나선형을 그리며 몇 번이고 오간다. 마치 이스마엘이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 모습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는  서로 다르고, 그 다름에 매혹되는 대신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모습만을 보려 할 때 사랑은 끝이 났다. 이집트가 조금만 덜 더웠더라면, 핀란드가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까? 아니, 그렇다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핀란드 문학교류협회(Fili) 영문 발췌본 :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 방법

Auringon asema 2002년 젊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칼레비 얀티 상, 2003년 핀란드의 시인 루네베리의 이름을 딴 문학상, Thank you for the book  핀란드 국내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작가 소개

1974년 생인 라냐 파소넨은 인도에서 태어나 1987년 핀란드로 이주했다. 헬싱키 대학교에서 셈어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가 25세일 때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했다. 동생 카이사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다.


2009년 작가는 한 언론(Kansanuutiset)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와는 연락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소설이 아랍어로 번역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이집트는 작가에게 지나간 과거이고, 핀란드인의 정체성에 더 가까운 작가의 책에 드러난 서구 여성의 시각을 변호하는 것은 너무 고된 일이기 때문다.


작가는 첫 작품인 Auringon asema를 발표할 무렵엔 아버지의 성을 따라 ElRamly라는 성을 썼지만, 오늘날에는 역시 작가인 남편 마르꾸의 성을 따라 파소넨이라는 성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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