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탕!!” 총성이 울렸다. 뜨거운 모래 위로 한 남자가 쓰러진다. 그의 머리 위에서 태양은 이글거린다. 폭염이 쏟아지는 한여름 해변에 일순간 적막이 흐른다.
태양은 무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모래는 타오르고, 공기는 뜨겁게 얽혔다.
총을 쥔 사내의 손이 떨렸다. 그날따라 눈 부신 태양이 사내를 더욱 지치게 했다. 모래에 반사된 빛은 그의 눈을 멀게 했고, 그의 영혼은 텅 빈 듯했다.
사내는 그저 이 뜨거운 태양과 고독한 해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사내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찰이 다가오자 사내는 체포된다.
“왜 사람을 죽였냐?”
사내는 마지못해 입을 뗀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경찰은 그의 황당한 대답에 당혹스러워했다.
태양이 뜨겁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태양이 뜨겁다고, 태양이 눈에 부시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인 뫼르소와 경찰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봤다.
소설 속 뫼르소의 행동은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다. 태양에 눈이 부셔서, 태양이 뜨거워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변호사가 그에게 정당방위를 주장하자고 했지만, 그런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뫼르소는 한사코 변화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되면 악의적 살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보통 사람의 조리에 어긋나는 부조리함이다.
뫼르소에게는 이성적인 논리나 도덕적 규범, 심지어 법원의 판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그가 태양을 핑계로 살인했다는 그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주장을 고수하는 까닭은 세상 자체가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에서다. 뫼르소에게는 전쟁으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세상이, 또 그런 삶이 더 부조리하다. 그는 삶에 아무런 애정도, 미련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했는지 분명해졌다. 1942년, 카뮈의 「이방인」이 발표되던 해는 전쟁과 파시즘과 비인간적인 폭력 그리고 광기 속에서 사람들은 삶과 존재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삶의 부조리는 곧 뫼르소의 삶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 투영되었다.
나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뫼르소는 끝내 왜 총을 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그 이유를 말했지만, 사람들이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더구나 뫼르소는 자기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이나 사회적 규범이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 사회에서 알제리 출신인 뫼르소는 낯선 '이방인'이다. 그에게 고독과 소외감은 그저 일상이다.
뫼르소는 자기 신념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조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진짜 태양 때문에, 그 권태로움 때문에, 그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낯선 땅의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살인했다. 나는 카뮈가 될 수 없고, 뫼르소도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억압해도,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말하는 시류를 아는 사람이고 조리 있는 사람이 된다.
김수영 시인의 말한,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같은 존재가 나라는 사람이다.
그런 나는 현명함이라는 이름으로 시류에 영합해 살아간다. 부조리함에 의지하여 사는 나는 따지고 보면, 부조리 그 자체다.
그것이 내 삶의 본모습이고, 내 실존이다.
나는 뫼르소의 철학을 갖지 못했고, 그럴 자신도 없다.
찌는 듯한 이 무더위에 화를 돋우는 모든 일을 그저 세상 탓으로 돌린다.
틈만 나면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의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