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Oct 26. 2024

금요일 밤의 혼술

촉수 낮은 불빛. 군데군데 투박한 질감의 마감이 도드라진, 그래서 더 정겨운 노출 콘크리트 벽. 찬기가 느껴지는 벽을 따라 일자로 놓인 세 개의 테이블. 안쪽 자리에 앉으면 혼자라도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된다. 뜬금없는 찰리 채플린의 흑백 사진과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제임스 딘의 반항적 모습이 회색빛 벽과 묘하게 어울린다.      


길모퉁이의 생맥줏집 여사장의 밉지 않은 과장된 친절. 그녀의 곰살맞은 웃음이 매혹으로 다가오는 밤. 헤실거리는 눈웃음이 나를 향한 호감이 아니라 장삿속의 친절임을 번연히 알아도 섭섭지 않다. 그녀의 헤픈 웃음은 생존의 무기인 것을 탓할 이유가 무엇일까.      



500CC 생맥주에 넘치도록 섞은 처음처럼의 맑고 투명한 소주. 술잔 속에는 잠시 파동이 일었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파도가 일렁인다. 그럴 리 없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술잔 속에 흔들리는 건 내 마음이다. 바람도 아니고, 회오리도 아니고 그저 심약한 내 마음이 흔들린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긴 이틀이었다. 살다 보면 누구인들 안타까운 사연이 없을까. 그렇게 이해하려 해도 그네의 사정은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누구보다 영민했던 아이가 그렇게 무너질 줄을 예전에 몰랐다. 아니, 그조차 섬세히 챙기지 않은 나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려온다.     


그저 운명이라 말로 위안하기엔 너무 속이 상하다. 바로잡기엔 너무 늦었다. 법은 아득히 멀리 있고, 잔뜩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이는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억지 주장을 되풀이한다. 지켜보는 내가 억장이 다 무너진다. 이런 날은 술이라도 한잔하지 않으면 쉬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아도 묵묵히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벗들은 너무 멀리 있고, 또 다른 벗은 오늘따라 남도로 먼 길 떠난 터라 혼자 곱씹으며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잔 잡아 권할 사람 없는 밤이면 혼자면 또 어떨까. 이런 날에는 드물게, 그것도 아주 드물게 고독마저 감미로운 혼술을 찾는다. 오늘 밤은 술이 아니라 애틋함에 쉬 취해 보련다.      


저녁을 먹지 않은 빈속, 깨끗한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소주 듬뿍 섞은 생맥주의 신박한 짜릿함. 식지 않은 열정은 영혼을 아프게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은 안타까운 법. 질투가 힘이라 하지만, 그 때문에 밤은 더 애틋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 했지만, 잔인한 바람은 꽃대마저 꺾어버리는걸.       


오늘 밤은 참 술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런지 술이 무척 달다. 아무리 입에 감기는 술이라도 500CC 생맥주 두 잔도 힘겹고, 섞어 마신 반도 채 마시지 못한 소주. 이만하면 적당한 알딸딸함으로 충분히 안빈낙도한다. 아직 늦지 않은 밤이지만, 그렇게 술자리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밤은 달빛 하나 없어, 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다. 그런 아쉬운 밤길을 나선다.      


길을 걷다 올려다본 칠흑의 밤하늘.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작은 별 두 개. 몇백 아니 몇천, 그보다 더 먼 몇백만 광년 떨어진 먼 우주에서 한참 먼 옛날 그 별을 떠난 빛이 드디어 이 밤 내게 도착했다. 그 순간 휑하니 부는 가을바람이 끝 간데없는 우주의 깊은 어둠을 헤매는 내 영혼을 깨운다. 바람은 소슬하고 밤이 짙은 어둠의 휘장이  드리운 길을 허위허위 걷는다.     

 

가끔, 오늘 같은 금요일 밤은 혼술을 즐겨도 좋은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