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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2시간전

<왕배푸른숲도서관>에서

왕배산이 한창 변색 중이다. 며칠 전까지 초록색이 온산을 덮었는데 어느새 왕배산은 천연색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생강나무가 울긋불긋 색동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우리 눈에는 초록색 잎이 가을을 맞아 알록달록하게 변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나뭇잎이 단풍색으로 물드는 게 아니라 제 속에 있는 단풍색을 끄집어낼 뿐이다.     


나뭇잎 속에는 초록색을 띠는 클로로필(엽록소)뿐만 아니라 주황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노란색을 띠는 크산토필, 빨간색을 띠는 안토시아닌이 들어 있다. 놀랍게도 나뭇잎을 변색하게 만드는 색소의 종류가 많게는 70가지나 된다. 이들이 봄과 여름 내내 숨죽이고 있다가 가을이 되면 본색을 드러낸다. 마치 한 권의 책이 겉표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식물은 빛 에너지를 이용해서 산소를 생산하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 태양이 가까이 있고, 햇빛이 강할수록 잎 속의 엽록소가 왕성하게 활동한다. 엽록소의 녹색 색소가 왕성하면 나뭇잎에서 초록 물감이 주르륵 흐를 것만 같다. 한여름의 광폭한 태양 아래 만물이 흐느적거릴 때 오히려 나뭇잎의 초록이 왜 그렇게 싱싱한지 짐작 가고도 남는다.      


가을이 오면 태양은 한반도에서 한층 멀어진다. 하루해는 짧아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 엽록소의 광합성 활동도 감소한다. 이제 초록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희미해진다. 이때쯤이면 엽록소의 강력한 초록의 힘 아래 신음하던 색소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카로티노이드, 크산토필, 안토시안, 타닌이 각자의 본색을 드러낸다. 이는 마치 도서관에서 각기 다른 장르의 책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도 같다.   

  

왕배산에도 나뭇잎 속 색소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초록을 몰아낸 가을 색이 나뭇잎 전면에 전진 배치한다. 숲은 더없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길을 연다. 사람들은 색색으로 물든 산길을 걸으며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러다가 산길 위에 떨어진 빨간 단풍을 보고 혹여 가을이 저만치 달아나 버리지나 않을까 아쉬워한다. 어차피 가을은 조락의 계절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이 계절 보내기를 안타까워한다.     


왕배산 가는 길


오늘은 왕배산에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산 초입에 자리한 <왕배푸른숲도서관>에 왔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정리하다 머리를 식힐 겸 산을 올랐다. 왕배산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에 위치한다. 산이라 해 봤자 높이가 해발 108m이니 뭐 구릉이라 불러도 탓할 바가 아니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수원화성(華城)과 현륭원(顯隆園)을 오갈 때, 이 산 정상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한다. 아마 왕(王)이 하사한 물 잔(盃)이란 뜻에서 산 이름이 유래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 본다.     


정작 놀라운 것은 왕배산의 가을 풍경보다 도서관의 멋진 시설이다. <왕배푸른숲도서관>이란 이름은 자연과 문화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서관의 건립에서 이름을 짓는 데까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였다. 단순히 책을 대출하는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와 문화적인 휴식과 정서적 힐링을 제공하는 도서관으로 탄생했다.


더욱이 전국 최초 에너지 무소비 1등급을 획득한 공공건축물로, 태양광 설비와 에너지관리 시스템을 갖춘 고효율·친환경 도서관이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다양한 색을 선물하듯, 이 도서관은 다채로운 지식과 문화를 선사한다. 2층 종합자료실 문을 나서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연결된다. 이곳은 왕배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라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도서관 1층 1층 유아 어린이 자료실


도서관 외부야 왕배산이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도서관 내부는 또 어떤가? 도서관 내부는 '도심 속의 숲'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자작나무로 만든 서가와 식물을 활용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1층의 유아 자료실과 어린이 자료실은 완전 개방형으로,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책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유실, 아동용 화장실, 유모차 보관소 등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마치 단풍나무가 어린 새싹부터 시작해 찬란한 가을 빛깔로 성장하듯, 이곳에서 아이들은 책과 함께 성장한다.     



1층 유아 어린이 자료실


2층 종합자료실은 성인들의 지적 탐구를 위한 공간이다. 멀티미디어 시설과 편안한 독서 공간, 3층의 야외 테라스까지 갖추어져 있다. 사람들이 홀로 독서할 수 있는 공간도 있고, 심지어 길레 누워 책 읽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독서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이곳은, 마치 다채로운 가을 단풍처럼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의 도서관이 편안하고 힐링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층 종합자료실
2층 종합자료실


우리나라의 도서관 문화도 꽤 발전했다. 동탄에는 <왕배푸른숲도서관> 못지않은 곳이 여럿 있다. 이런 발전은 우리 사회의 문학적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최근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이나 최근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러한 독서 문화의 저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치 단풍나무가 봄부터 축적해 온 색소들이 가을에 찬란한 빛을 발하듯, 우리의 문학도 오랜 시간 축적된 독서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적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3층 테라스


<왕배푸른숲도서관>과 같은 훌륭한 문화 공간들이 전국 곳곳에서 우리의 지적 토양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우리 문학의 미래다. 단풍이 저마다의 빛깔로 가을을 수놓듯,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갈 것이다. 아니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과학의 인재로 쑥쑥 자라나는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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