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의 인문학 4】
아름다운 욕망의 색
오렌지색 로고
여성의 로망으로 등극한
에르메스의 탁월한 선택
사랑의 색
나 주황이야. 내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 16세기까지 주황색이라는 단어는 없었다고 했지. 그렇지만 이 색을 만든 염료 기록은 많아. 말하자면 내 이름은 없었지만 내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지. 웃기지만 나를 '더 어두운 노란색' 혹은 '금색'으로 표현하기도 했지. 15세기 중반에는 나를 '샤프란 색‘으로 묘사하기도 했어.
옛날에는 내 색깔을 내려고 먼저 빨간색 염료 통에 천을 담가. 그다음에 노란색 염료 통에 옮겨 담는 거야. 아니면 처음부터 빨강 염료와 노랑 염료를 섞은 통에 천을 넣는 거야. 여기다가 꼭두서니 뿌리에 산성 매염제를 첨가해서 직물에 아름다운 주황색을 물들였어.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방법으로 따뜻한 주황색 염료를 만들었어.
사람들은 일찍부터 나를 염료로 사용했어. 주황인 나를 좋아하긴 했지만, 내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지 않았어. 그러다가 16세기 들어와 유럽에 오렌지가 전파되었어. 오렌지 나무가 자라자, 사람들은 부와 사랑의 상징으로 오렌지를 좋아했어. 덩달아 나한테 오렌지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거 있지. 사람들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를 보고는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지. 그러니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름답고 낭만적인 분위기라 칭찬이 자자했어.
화가들이 사랑한 오렌지색
르네상스의 미술을 개척한 산드로 보티첼리는 오렌지색을 너무 좋아했어. 그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 그리고 <봄>이란 그림도 빼놓을 수 없어. 이 두 그림에서 등장하는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이잖아. 그녀는 오렌지색을 입고 오렌지 숲에 살았어.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나를 사랑의 색깔로 존경하게 됐어.
사실 화가들도 처음부터 나를 환영한 건 아니야.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화가들은 본격적으로 나를 관심이게 봤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는 1872년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인상, 해돋이》를 세상에 내놓았어. 오렌지색 해가 솟는 아침 풍경이 인상적이지? 가까이서 보면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인상(印象, impression)이 눈에 확 들어오잖아. 그래서 이런 화풍을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라고 하는 거야.
인상주의가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 나도 캔버스에 떡하니 한 자리 차지했어.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1954)를 중심으로 한 야수파 화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어. 그들은 야수처럼 인상주의자들조차 쓰기를 두려워하던 강렬한 주황색을 과감하게 사용했어. 그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도전적이고 과감한 주황색을 캔버스로 옮겼어. 그들은 내게 감춰진 야수의 본능을 폭발시킨 거야.
에르메스의 오렌지색 욕망
주황색인 나와 뗄 수 없는 회사 이야기를 한 번 해볼게. 세상 모든 여인의 로망인 에르메스 이야기야. 버킨 백과 켈리 백, 한 번쯤 이름 들어봤을 거야. 사실 주황인 나도 갖고 싶어. 척 메고 거리를 나서면 얼마나 우쭐할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
나 에르메스 켈리 백이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오렌지색 백 이쁘지 않아? 에르메스의 색깔, 그게 바로 나야. 내가 아름다워 에르메스가 승승장구하는 건 아닐까. 뭐, 그건 내 착각이라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주홍이 로고에 들어 있으니, 마음이 편하고 따뜻해지는 건 사실이잖아.
세계적인 가족 명품 브랜드 판매 기업인 에르메스는 원래 말안장과 마구 용품(馬具)을 만드는 회사였어. 독일계 프랑스 이민자 티에리 에르메스(Tierry Hermès)가 1872년 파리에 설립한 회사야.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 끄는 마차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어. 촘촘한 박음질과 고급 가죽으로 만든 에르메스의 마구 용품은 유럽 왕실에서도 좋아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어.
자동차가 세상에 등장하자 말과 마차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몰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물건을 넣을 가방과 지갑이 필요했어. 에르메스의 눈이 번쩍 띄었지. 에르메스는 가죽으로 된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어. 역시 장사 머리는 타고나야 해. 마구 용품 전문 회사에 자동차는 엄청난 위기를 몰고 왔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에르메스의 매서운 눈이 놀라워.
에르메스 제품이 유럽 상류층의 인기를 끌게 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어. 에르메스는 프랑스 최초로 지퍼를 단 가방을 만들어 보급했지. 그들은 처음으로 사다리꼴 형태의 여성 백을 제작하는 등 대담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선도했지. 이런 혁신과 현대적 감각이 에르메스를 세계적인 명품 기업으로 만들었어. 에르메스는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혁신 기업으로 눈치가 빨랐지.
종이가 없어 선택한 오렌지색의 대박
에르메스의 오렌지색 선물상자가 기억나? 그걸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 처음 에르메스의 선물상자는 황금색 테두리가 있는 크림색이었어. 왼쪽의 선물상자 보이지?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자 프랑스 전역의 판지들이 부족해졌어. 전쟁 물자로 동원되고, 묘하게도 오렌지색 판지만 남았어. 할 수 없이 에르메스는 선물상자의 색깔을 오렌지색으로 바꾼 거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대박을 터뜨린 거지. 사람들은 에르메스의 오렌지색 상자를 들고 다니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상자 안에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켈리 백이나 영화배우 제인 버킨의 오렌지색 버킨 가방이 들었다고 생각해 봐. 여인들의 부러운 눈동자가 보여. 이 가방들이 얼마나 비싼지는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에르메스는 1950년대 초부터 브랜드의 상징색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어. 가죽 제품 회사로 출발한 에르메스는 밝은 가죽의 이미지를 가진 오렌지색을 회사 로고로 선택한 거야. 로고 글자 E 위에 프랑스의 악센트 표시를 살림으로써 패션과 문화의 중심인 프랑스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자랑해.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세계 최고의 명품 패션 브랜드라는 평을 듣는 에르메스가 오렌지를 품은 것은 ‘신의 한 수’가 됐어.
오렌지색은 늦게 이름을 얻은 만큼 흑역사가 없다고 했지. 싫어하는 사람이 크게 없단 말이지. 우리의 삶도 오렌지 향기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지만 삶은 늘 향기로운 것은 아니야. 너무 뜨겁지 않으면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싶어. 슬퍼도 너무 절망하지 않고. 기쁘다고 너무 티 내지 않는 지혜를 배우면 좀 좋을까.
에르메스가 빨강보다 약하고, 노랑보다 덜 튀는 따뜻한 나를 택했어. 우리도 누군가의 오렌지색이 되면 좋겠지. 왜냐하면 나는 활력과 에너지를 높여 주고, 낙관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사고를 향상하는 데 도움을 주잖아. 나는 사람들이 기분을 좋게 하고 창조적 영감을 주기도 해. 주황인 나는 친화력이 있고 사회성이 좋아. 사람들 간의 소통이 필요할 때면 주황이 칠해진 곳을 찾아봐. 따뜻하고 온화한 나는 사람들을 포근하게 만들어주지. 주황인 나랑 함께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훈훈해져 이야기가 잘 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