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정 엄마도 쉬셔야지.
나는 친정이 멀다.
명절에는 눈에 불을 켜고 명절 대수송 KTX를 광클해야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 남편과 시댁은 나 역시 가족도 있고 형제도 있고 부모도 있는데 명절에 친정을 가서 내 가족을 보고 내 가족들과 지내고 싶어 하는 내 당연한 마음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며느리의 의무로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며 20,30대의 어깨에도 오십견이 올 수 있구나를 경험하는 동안 내 남편은 , 혹은 며느리의 의무를 강요하는 시댁은 당신의 아들도 사위의 의무로 처가에 가서 장인 장모에게 장인 장모의 딸과 손주들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며 안도와 위안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몇 년간은 명절에 친정을 못 가고 시댁에서만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불합리하게 여겨지던 것들을 바꾸고 투쟁했다. 그래서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사실, 내 투쟁의 결과로 시모가 변한 건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세상의 이치에 따라 변한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권력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부모의 기세가 쇠약해 지자 며느리에게 역시 그 기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셨다.
어느 순간 나 역시 자연스럽게 명절에는 친정에 가서 내 가족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내 엄마도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셨다.
가족들이 모이면 일단 음식을 먹고 나눠야 하는데 엄마는 이제 6명의 손주와 6명의 자식 부부들을 다 거느리고 먹이고 치우고 비비며 시간을 보내게 하기에 힘이 부친다.
나 역시 지난 시간 동안 시댁에서 명절에 손님들이 오면 음식을 마련해서 먹이고 치우고 정리하고 하는 부산스러움들이 얼마나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인지 알고 식구들의 명절 나기가 , 그것을 주관해야 하는 여성(시어머니도 포함)에게 힘든 일인지 겪어봐서 안다.
그래서 친정부모님은 명절에는 가족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좋은 호텔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 끼 나누고 헤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이런 선택이 있기 전에 우리 엄마아빠도 내 남동생 부부에게 시부모로서의 지위를 누려보고 싶어 하셨다. 특히 며느리인 올케에게 며느리가 준비한 음식 한번 대접받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겪었던 언니와 내가 진작에 엄마에게 그런 열망은 버리는 게 옳다고 설득을 계속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친정 구성원 중에서 아직 아이들이 가장 어린 남동생네 부부는 사실 아이들만 챙기기도 벅찬 시기이니 명절 노동에서 올케는 빼라고, 올케를 배려하자고 설득했다.
친정에서 명절 준비는 남동생이 명절 전날에 들어와서 명절 음식을 돕고, 올케는 자기 집에서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방식으로 몇 년간 진행되었다. 내 남동생은 자기의 매형들과는 다르게 가사 노동은 평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다. 어느 순간, 엄마 역시 명절음식 준비를 며느리에게 시키고 싶다는 열망 자체가 이룰 수 없는 열망이고 그 열망을 고집하면 아들과 사이가 멀어질 수 도 있다는 걸 깨달으시자 포기하셨다.
그리고 막상 엄마도 명절에 집에서 음식을 하지 않고 나가서 즐기다 보니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셨다.
이번 설에는 친정 식구들 모두 친정 언니가 예약해 놓은 멋진 신상 리조트에서 즐기기로 했다. 지난 추석은 친정 가족들 다 같이 해외여행을 떠났었다.
그 누구도 기름 쩐내에 속이 울렁거려하면서 어깨를 주무르며 전을 뒤집을 필요도 없어지자 내 친정집이 시댁인 올케는 말할 것도 없고 엄마가 매우 만족해하시고 기뻐하신다.
나 역시 친정행 비행기를 예약하는데 기쁘다 (올해도 명절 대수송 KTX는 실패했다. KTX 없으면 비행기 타면 되고 비행기 없으면 애들 카시트에 태우고 운전하면 되는데, 아이들이 더 어릴 때 시댁에서 더 있으라고 잡는다고 , 애들 들쳐 매고 혼자라도 친정에 올라갈 생각을 못했다니 나도 참 약해 빠졌었다)
명절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가족은 모여서 행복하고 만나면 반가운 존재로 끝나야지 그 누구라도 만남이 힘들어지거나 부담스러워지면 안 된다. 안 그래도 이 험하고 풍진 세상에서 살아내느라 기진맥진한데 가족들에게 마저 마음 내려놓을 수 없이 의무만 남는 관계가 된다면 삶이 너무 힘들다.
황금같이 귀한 휴일. 평소에는 일에 치이고 삶에 찌들어 편히 뒹굴지 못하고 게을러지지 못하는데 명절 동안은 재충전하고 좋은 거 먹고 기력을 회복하는 시기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