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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Oct 21. 2024

강의를 하고 돌아오던 날

저녁노을 만이 나를 위로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린다.

인생은 그리 가혹하지 않다.

멀리 보고 길게 보면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 멀리 길게 볼 힘이 없다.


강의를 하고 돌아온 날도 그렇다.

작년에 했던 교육청 공모 사업의 성과가 어떻게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그 일을 할 때 정말 즐겁게 진심을 다해서 했더니 성과가 이렇게 나타나는지 타 지역 여성재단에서 강의 제안을 받았다.

현장에서 양성평등 수업을 하고 교육하던걸 공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상이 힘들고 심신이 지쳐 고사하고 싶었지만 문득 드는 생각이 나, 이 일이 참 좋은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타인에게 내가 하는 일을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난생처음 강의료라는 걸 벌게 되었다. 지금 내 현실에서 이렇게 부수입이 생기는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사실 긴장과 불안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라 청심환도 먹었다. 누군가 앞에 선다는건 참 어렵고 긴장되는 일이다.


그날, 걱정했던 것보다 강의는 잘 마쳤다.

그런데 강의 때문에 퇴근이 늦어졌다.

집에서 혼자 기다리며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는 아이의 저녁을 챙겨주고 학원을 보내려고, 아이의 입에 밥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 퇴근했지만 시간이 늦어서 집에서 기다리던 아이는 저녁을 못 먹고 학원으로 향했다.

물론 아이는 엄마가 왜 늦냐?, 나 배고프다, 엄마가 없으니 초콜릿 먹고 갈 거다, 하는 불만과 투정을 늘어놓고 장문의 카톡 폭탄을 남겼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평소에 먹고 싶었으나 엄마가 못 먹게 했던 인스턴트와 배달음식을 대령해 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양성 평등한 사회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그녀들이 사회에 나갈 때는 일과 가정 이 양립이 돼서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것만큼 너무나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되길 간절히 원한다.

지금 비록 나는 일도 육아도 가사도 모두 다 감당하며 하루하루 허덕이며 찌들며 살아가는 싱글 워킹맘이지만 , 한 가지 희망은 내가 이렇게 힘들게 키워내는 아이는 자랄 것이고 그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어른이 된다면 내가 살아온 것보다는 조금 더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편안한 일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왜냐면 내가 지금 그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본 노을은 참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나를 위로해 주고 앞으로 나아가라 격려해 주는 느낌이었다.

강의를 하느라 긴장한 탓에 아드레날린 폭풍이 지나갔는지 집에 오니 맥이 탁 풀리고 꼼짝도 하기 싫었다. 아이에게 건강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싶지만 그래,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기름지고 짜고 맛있는 배달음식을  야식으로 먹고 맥주도 한 캔 해야겠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가 오늘 왜 퇴근이 늦었는지, 왜 너의 저녁을 챙겨줄 시간이 없었는지 이야기해 줘야겠다.

나는 낙조를 참 좋아한다. 태안반도 같은 곳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 그게 얼마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지 안다. 유년시절에 가족여행을 가던 꽃지나 삼봉해수욕장에서 붉게 물들며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던 태양을 본 아름다운 기억은 나를 살게한다. 하지만 지금은 탁 트인 벌판에서, 바다에서 지는 해를 감상할 여유가 없다. 퇴근길에 건물 사이에 잠깐 지는 해를 보는 것도 힘들다. 아주 운이 좋아야지만 잠깐 눈돌려 하늘을 볼 짬이 난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에게 주어진 숙제를 잘 끝내놓으면 어린왕자가 방향을 틀어서 하염없이 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듯이 나도 하염없이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겠지. 언젠가는 매일 저녁마다 의자를 살짝 돌려며 눈만 살짝 돌려 들면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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