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 걸린 팔순의 노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동서양 철학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인간에게는 정신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막상 병에 걸리고 보니 육체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입니다. 육체가 병드니 그렇게 열심히 갈고 닦은 정신도 모두 흐려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육체에만 신경 쓴다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을 구별해내기란 사실상 어려울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찬란한 문명을 이뤄내며 교육을 이어가고 지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의 오류를 줄일 수 있는 것도 모두 정신의 영역이니까요.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 육체와 정신은 사실상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없을 만큼 모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육체는 정신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육체가 병들면 정신도 병들고, 반대로 정신이 병들면 육체도 망가집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현대 철학에서도 정신 못지않게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며칠 전, 우리 국민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큰일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육체와 그 속에 있는 정신의 민낯을 국민 모두가 적나라하게 지켜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동안 감춰왔던 우리 사회의 썩은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내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에서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던”, 아니 아프지 않다고 느꼈던 시간들…, 그것은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기도 했습니다.
병든 몸이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아픈 부위를 도려내는 외과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정신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휴식과 꾸준한 치유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 그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되새기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회의원’ ‘민주주의’ ‘주권’ ‘정치’ 등 때로 우리를 혼란과 분열 속으로 빠트리는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개념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굳어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근본이 되는 약속이자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겪었던 그동안의 과정이 육체의 병든 부분을 찾아내고 수술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함께 치유하는 과정이 남아있습니다. 상처가 아물고 다시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이들이 살아갈 이 나라의 찢긴 상처가 잘 아물 수 있도록, 다시는 그처럼 큰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굳건하도록 지켜야 할 책임이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