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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스미다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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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68. 유목민과 노마디즘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몽골하면 드넓은 초원과 하얗고 둥근 게르, 그리고 하늘에 촘촘히 박힌 수많은 별과 은하수를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로 본 몽골도 상상속의 몽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몽골의 초원에서는 시간도 잠시 멈추나 봅니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뭉게뭉게 피어나 손에 잡힐 것 같은 하얀 구름, 초록의 대지 위에 가득 피어 있으나 아무도 꺾지 않는 수많은 야생화까지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 속 장면 같았으니까요.


한곳에서의 정착이 끝났다고 여겨지면 언제든 장소를 옮겨 새롭게 정착해 살아가는 유목민은 무엇 하나 급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한가롭게 일상을 이야기하고, 둥근 게르에서 끼니를 때울 음식을 만들고, 해가 지면 잠을 잡니다. 이들이 기르는 말과 소와 양들도 해가 질 때까지 자유롭게 풀을 뜯고 해가 지면 목동의 손에 이끌려 한 곳에 모여 잠을 잡니다.


드넓은 땅에서 게르를 짓고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도, 그렇다고 불행해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막을 지나다 길이 끊기면 두려움 없이 내려 길을 만들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안에 내재된 리듬을 타면서 조금 익숙해져 빨라진다 싶으면 새로운 곳을 찾아가 다시 느리게 시작하는 법을 실천하는 수행자 같습니다.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찾아 이동하며 그곳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것, 유목민의 이러한 삶은 ‘노마디즘’이라는 철학용어로 탄생했습니다.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것, 그것은 현실을 바탕으로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으려 할 때 가능해지는 일이겠지요.


생명이나 우주의 이치처럼 다만 어디론가 흘러가는 일상, 그것은 계절을 닮았습니다. 어떤 계절이 따뜻하고 좋다고 해도 계절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그 속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죽고, 그렇게 우주는 지속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청춘은 봄, 중장년은 여름, 갱년기 이후는 가을, 노년기는 겨울이라 하겠습니다. 그중에는 분명 빠른 계절도 있고 느린 계절도 있겠지만 어느 한 계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는 그 계절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청춘의 시기에 노년을 걱정하거나 노년의 시기에 청춘을 그리워하며 내게 주어진 계절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우를 범하곤 하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 계절을 위해 우리는 다만 지금의 이 계절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겁니다.


유목민을 지켜보는 동안 문득 세상의 속도가 느려지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의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내 앞에 다가올 찬란하고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을 위해 나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유목민처럼 순응하면서, 내 삶을 느리게 만들어 가면서 조용히 흘러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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