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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by 홍윤표
카메라: MINOLTA HI-MATICAF-D / 필름: Kodak Colorplus 200 / 일자: 미상

거리에 낙엽이 있어서 아직 가을인 줄 알았는데 큰 눈이 오고 나서야 가을은 이미 가버린 걸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낙엽은 가을의 증거가 아니라 흔적인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난 뒤 남겨진 것들.

Aphrodite's child의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이라는 노래가 있죠. 사랑과 인생을 계절의 순환에 비유해서 불렀다고 해요. 아주 어렸을 적 명절에 가족끼리 차를 타고 갈 때면 아버지는 항상 올드팝 테이프를 트셨는데 그때 종종 들어서 알게 된 노래였죠.

대학생일 때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말도 안 하고 어쩌다 말을 거시면 대꾸도 잘 안 했죠. 그때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 잘 안 풀려서 거의 매일 술만 드시던 모습이 싫었나 봅니다. 술에 취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 아버지 모습이 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 났었죠.

어느 일요일 저녁 아버지가 형과 저를 데리고 집 앞 고깃집으로 갔습니다. 부자간의 사이를 조금 풀어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다 큰 아들들과 늙어버린 아버지는 대화가 없었습니다. 묵묵히 눈앞의 고기만 굽고 주섬주섬 입에 넣었죠. 아버지께 소주도 안 따라드려서 혼자 자작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싶으셨는지 이 노래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프링, 섬머, 윈터 앤 폴이라고 하잖아. 왜 가을이 맨 마지막에 붙었는지 알아?

침묵.

정답은 그냥. 그냥 멜로디에 따라서 좋은 어감으로 만드느라 그랬대.

침묵.

그날의 대화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우린 아무런 말도 안 했고 아버지도 말씀 없으셨죠. 그렇게 우린 짧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발끝만 내려다보며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났습니다. 가을이 되면 이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날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답잖은 농담이 생각이 납니다. 아들들의 침묵에 무안해하시며 고기의 탄 부분을 집게로 긁어내시던 소매가 생각이 납니다.

그날 왜 그 질문에 좀 더 흥미를 보이지 않았을까요. 왜 아버지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라도 짓지 않았을까요.

저에겐 가을이 꼭 겨울 다음에 오는 계절 같습니다. 가을이 늘 마지막 계절인 것 같습니다.

가을은 언제나 가고 난 뒤에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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