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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영 Feb 04. 2024

푸르스트의 정원에 들러 독약을 마셨습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선생님. 최근에 뭔가를 하나 발견했는데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어요."


요가를 하며 사람의 몸을 관찰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팔은 얼마나 올라가는지, 목과 허리는 얼마나 잘 서 있는지 흘긋흘긋 바라보던 순간. 깨달았다. 아, 두려워하고 있구나.


눈을 감았다. 선생님은 그때 그 장면을 떠올려 보라고 말했다. 다니던 요가원의 로비.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들어가기 위해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너무 정신이 없다.  


"혹시 그거랑 연관된 기억이나, 장면이 떠오르는 게 있을까요?"


내 앞을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부모님이다.


"그 사람들이 뭘 하고 있어요?"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집안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음... 뭘 하고 있는 거지. 잘 모르겠다.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은 몇 살이에요?"


갑작스러운 시선의 전환. 앞을 얼쩡이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로 초점이 맞춰진다.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되게 어리네요. 아이는 뭘 하고 있어요?"


아이는 거실 방바닥에 혼자 앉아있다. 하얀 기저귀를 찬 채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기저귀... 아이는 네 살이 아니라 두 살이었다.

"걷지도 못하는 나이네요. 그런데 어른들이 돌보지도 않고 아이를 바닥에 두고 있어요. 그건 방치예요. 혹시 그 아이는 마음이 어때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살밖에 안된 아이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혹시 몸에서는 뭐가 느껴져요?"


벌거벗은 채 바닥에 앉아 몸을 허우적거리는 아이. 아이는 무언가 허전하다. 도대체 어디가 허전한 것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의식을 가져가본다. 머리, 어깨, 가슴, 배, 그리고...


골반이다. 기저귀에 둘러 쌓인, 깊고 어두운 나의 아랫배.




기억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비록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해도 뼈 하나, 근육 하나하나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고, 무슨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골반은 우리가 해소하지 못한 기억들이 쌓이는 곳이다. 실제로 요가 중 골반을 풀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고 한다. 또한 자궁이 좋지 않은 분들 중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연결 고리가 있다.


내면에 잠들어 있는 감정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감정의 몸을 이루는 층들 속에 숨겨져 있던 슬픔이 아사나라는 수단을 통해 표면으로 올라온다. 몸속에 갇혀 있던 감정들을 경험하고 해방시키는 여행을 통해서, 나는 깊이 잠재되어 있던 감정들을 더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 아쉬탕가 요가의 힘, 키노 맥그레거


골반 이외에도 몸을 뒤로 젖히는 후굴 자세 중 감정적인 무언가가 분출되었다는 요기들을 자주 보았다. 인간의 몸은 참으로 이상해서, 가장 중요한 부위인 장기들을 담은 배를 세상에 내놓고 다닌다.


그런 본능적인 불안으로, 우리는 힘든 상황에 놓이면 상체부터 안으로 말아낸다. 그리고 어깨는, 가슴은, 배는 소리친다.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마'.


후굴은 정 반대의 몸짓이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몸을 앞으로 펼쳐내야 한다. 어깨는 뒤로, 가슴은 위로, 배는 앞으로. 그리고 단단하게 뿌리내린 다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 작업이 끝났다면 아마 나는 갈기갈기 찢긴 마음으로 상담소 밖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한 가지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뭐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어요?


음... 그냥 안아주기를. 따뜻한 체온으로, 내 온몸이 누군가의 어깨에 닿아 새근새근 안겨 있기를 원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누군가 우유를 먹여주고, 심심하면 침대에 뉘어 까꿍놀이를 하다가, 조용히 잠이 들기까지 기다려 주길.


"좋아요. 그러면 그걸 지금 성인이 된 본인이 가서 해줄 수 있을까요?"


터벅터벅 혼자 거실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아이의 곁에 함께 눕는다. 아이는 뒤로 돌아 누워 잔뜩 경계를 한다. 온몸이 경직되어 있고 차갑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아이가 괜찮아질 때까지 머무르고 머무른다.


아이가 서서히 몸의 긴장을 풀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동그랗게 말린 등을 점점 나에게 기댄다. 따뜻하게 올라오는 체온. 그리고, 아이는 이내 뒤를 돌아 폭하니 안긴다. 성인이 된 내 아랫배를 지긋하게 누르며. 그렇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거실 바닥에 누워 함께 잠이 들었다.




'작업'이 끝나고, 서서히 눈을 떴다. 갑자기 들어오는 햇빛 사이로 놀란 기색이 역력한 선생님의 얼굴. 오늘 작업이 너무 깊게 들어가서 며칠 동안은 힘들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이 재처리되는 중인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차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슴 한 편으로는 '나도 그래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또다시 떠오르고 또 떠오르는 무언의 감정들.


대화로 풀어가는 상담, 약물, 그리고 요즘 떠오르는 요가와 명상, 안구운동치료법 등 다양한 치료 방법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바뀌기 위해 이 모든 것은 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당시의 기억에 접근'하는 것이다.


단, 아주 조심스럽고, 안전한 상황에서. 그리고 그 압도적인 과거의 기억을 자신다운 경험이나 생각으로 색칠해 본다. 그때의 내가 가장 원했던,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자신에서 벗어난 단단한 마음을 갖고 지금-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아직 한참의 작업이 남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과거들. 하지만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불러와 나만의 역사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간다.   


영화 마담 푸르스트의 비밀 정원의 주인공이 가슴에 새긴 이 대사처럼 말이다.


Vis ta vie!
네 인생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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