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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r 15. 2023

07 어른의 연애




 본가가 경기도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간지 어느덧 4년이 되어간다. 동시에 자취를 시작한 나는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나온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리해야겠다 제대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열어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편지 박스는 무려 세 박스나 되었다. 하나하나 읽으며 버릴지 모조리 남길지 고민하던 찰나 케케묵은 세 번째 박스에서 당신을 발견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을 미워한 날이 길었지만 이제는 미소 짓는 나를 보니 당신도 추억이 되었나 보다. 삐뚤빼뚤 엉망인 글씨 사이로 당신의 서툰 사랑이 녹아있다. '비록 어제 싸웠지만 나는 너를 많이 사랑해'라는 글을 시작으로 '천 일을 축하하며 오래오래 사랑하자'라는 지켜지지 못한 약속도 덩그러니 쓰여있었다. 우리가 천일을 함께했구나. 새삼 세월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문득 당신은 잘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당신이 케케묵은 세 번째 박스와 함께 떠올려질거라 생각지 못했다.

 

 터키로 2주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당신은 집 앞에 찾아와 2주 분량의 편지 총 14장을 건네주었다. 그 당시에도 감동이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아주 많이 뭉클해졌다. 어떠한 무거운 다짐 없이도 그저 사랑만으로 채워졌던 우리의 사랑, 나의 20대.


 그때 내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맹목적이고 진취적이다 못해 사랑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아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이기적인 상처를 주기도 했고 너무 사랑한 나머지 거세게 내리는 소낙비를 무작정 같이 맞기도 했다. 싸우고 비틀어져도 함께라면 뭐든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무모함마저 순수함으로 둔갑되어 박스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의 내가 내리는 사랑의 정의는 세월의 흐름만큼 변했다.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많았다. 사랑하다 떠나고, 그리워하다 새로이 시작하는 사랑을 따라 실망과 슬픔 속에서 덜 상처받는 법을 꾸준히 고민했다. 그리고 알게 된 첫 평온, 무지의 시간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모든 시간을 공유하고 사소한 일정까지 알고 지내던 예전과 달리 믿음과 신뢰라는 이름으로 서로만의 시간을 존중할 넉넉함이 생겼다. 때때로 잘 자라는 인사 뒤 밀린 책을 읽거나 아껴둔 드라마를 보는 등 서로의 관계에서 한 발 물러나 각자의 공간을 지켜주는 것. 내가 모르는 상대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우리’와 ‘너와 나’를 모두 사랑할 줄 아는 것. 성숙한 연애로의 첫 발이었다.


 꽃 피는 봄, 아마 요즘 계절과 비슷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당신은 군시절 친해진 몇몇 지인들과 국내 여행을 갈 예정이라 말하였고 나는 잘 다녀오라 답하였다. 그러자 당신은 대개 여자들은 남자끼리 여행 간다고 하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걱정하지 않냐며 툴툴댔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이 사람아) 그런 당신에게 우리는 아직 신뢰가 풀로 차있기에 이것저것 질문할 게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의 신뢰에 금이 간다면 사소한 대화에도 의심과 불신이 가득 차 무수한 질문 공세를 할 거라 협박(?) 했다. 완벽히 이해한 것 같진 않았지만 신뢰가 풀로 차있다는 말에만 꽂혀 당신은 미소 지었다. 내가 빠진 당신의 시간은 반대로 나만의 시간이기에 그저 각자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무지의 시간은 반대로 신뢰의 시간이기도 하다. 각자의 삶에서 상대에게 실망을 줄 행동과 상황을 만들지 않고 함께 있지 않은 시간마저 평온하게 해주는 것.



 두 번째 박스에는 20대 중반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무정한 당신이었다. 당신은 참 자유로운 영혼으로 처음엔 어떠한 틀에 갇히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에게 있어 나는 10순위정도 되는 것 같았다. 서운함을 토로해도 줄곧 바쁜 사정을 나열하기 바쁜 당신이었다. 하나에 빠져들면 끝을 보는 성격에다 완벽주의자 성향까지 다분했던 당신의 삶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나의 소중함을 더 깊게 깨달으면 바쁜 삶 속에서도 나를 바라볼 여유가 생겨날 거라 굳게 믿고 기다렸다. 나의 진심이 당신을 바뀌게 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당신은 다소 무례했지만 죽일 놈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당신을 탓하진 않는다. 다만 당신을 만난 이후 연애에서 상대의 결점과 마주하면 습관적으로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상대가 바뀌길 바라기 전에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의 일부가 감당할 수 있을 무게인지 고민해 보는 게 더 현명한 방법임을 터득했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무작위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뭐든 분명한 이유와 동기가 필요하기에 그 어려움도 기꺼이 끌어안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마치 부루마블의 황금열쇠를 얻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정한 사랑으로의 찬스가 될 수도 있고 더 가기 전에 여정을 끝낼 이른 마침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비록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의 일부지만 그 외 무수한 장점들로 관계를 붙잡거나 하나의 고난이 온 장점을 뒤덮을 만큼 거창하여 관계를 끝내거나. 상대를 바꾸려 아등바등 노력하기를 멈추고 ‘너 이거 감당되겠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대와 실망의 범벅 속에서 허우적대기 싫었다.



 처음에는 상대를 많이 사랑하기에 이해하려 애썼고 그래서 괜찮다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 서로 편해지고 관계가 평이해지다 보면 ‘내가 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라는 신원미상의 억울함이 차오른다. 연이어 상대의 뾰족한 부분을 꼬집으며 한숨 가득 말한다. 역시 우린 안 맞아. 상대는 늘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제야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면 빠른 포기를 추천한다. 당신과 나의 연애 모두가 부디 조금은 더 평온하길 바라기에.


 돌이켜보면 사랑과 이별 그 반복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나은 연애로 이끌어준다. 아프고 힘들어도 깨달음이라는 또 하나의 황금열쇠를 손에 쥐고 헤어져 나의 삶에 더 행복하고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 광활하고도 교과서적인 문장의 무게를 우리는 안다. 상대의 삶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일, 상대와 다른 부분을 감내할 나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 바꾸려 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함께 걸어갈 용기를 키우는 일, 사랑이 조금씩 평온해지고 성숙해지는 길.


 엄마는 뭐 하러 버리지 않고 모셔두는지 못내 못마땅한 표정을 보이셨다.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올 텐데 하며. 나는 반나절 꼬박 읽은 여러 편지들을 차마 다 버리지 못하고 가장 빳빳한 박스에 몰아넣었다. 그날 나의 마음은 그리움보다 행복함이 더 컸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보다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쑥스러운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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