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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r 26. 2023

09 여보자기 그리고 당신




 여보, 자기, 기타 등등의 애칭. 저마다 특별한 사랑을 담아 연인을 부르는 수만 가지 단어들. 나는 그중 내 이름을 제일 좋아한다. 성을 뗀 순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면 마치 정말 나의 사람이 된 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흔치 않은 성을 가진 내게 항상 제멋대로 애칭을 만들어준 당신들에게 미처 많이 들어보지 못한 나의 이름. 새로운 연인에게 나의 이름을 아주 많이 듣고 싶다.


 평범한 토요일 먼저 도착한 카페에 앉아 향긋한 자몽티 한 모금 마실 무렵 문이 열리고 당신이 들어오며 불러주는 내 이름. 오목조목 서운했던 이야기를 늘여놓는 나를 진정시키려 나지막이 불러주는 내 이름. 사랑을 감출 수 없어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주는 내 이름. 이곳저곳에서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랑의 시작 그 훨씬 이전 우리가 처음 서로를 알게 되는 순간. 각자의 방식으로 이름을 외우고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고민하다 하나씩 불러보며 낯선 이름을 익숙토록 하는 시간. 때론 이름보단 또 다른 수식들이 대체되는. 자기가 언제 자기가 되었지? 되돌아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랑의 일률적인 시작점. 쉽사리 시작된 듯 보여도 섬세한 사고가 뒷받침된 당신과 나의 첫 교감.


 

 이제는 결혼해 귀여운 딸을 키우는 친구는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과 사귀게 되면 '자기'라 부르고 싶다 말했었다. 이유를 묻자 그에게서 전화가 올 때 핸드폰에 '자기'라는 단어가 뜨면 왠지 모르게 설렐 것 같다 답했다. 참 별 걸 다 정해놓는다 생각했다. 함께 아는 친구의 집들이를 가는 차 안에서 불현듯 그날의 이야기가 생각나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도 자기라고 불러?"

 "그럴 리가. 부르긴커녕, 시부모님 앞에선 그나마 노력해서 율이 아빠라고 하는 걸?"

 특별히 로맨스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설렘 가득하던 그녀의 과거 얼굴이 스쳐 지나가 괜스레 멋쩍은 순간이었다. 한 때는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애칭도 시간이 지나 관계가 짙어지면 서로의 애칭마저 낯 뜨거운 단어에 불과해지는 것인가. 미혼자 또 씁쓸하네.


 "너는 왜 이름 불러주는 게 좋은 거야?"

 핸들을 멋들어지게 꺾으며 그녀는 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 늘 내 이름에 목말라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줄기차게 반장을 해온 터라 이름대신 '반장 누구야?' 하며 '반장'으로 불리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들이 지어 준 요상한 별명들로 불리었고, 위로 오빠가 있어 엄마는 늘 '현이 아빠'라 아빠를 부르며 의도치않게 나를 고아(?)로 만들기 일쑤였다. 특색이 있거나 한번 들으면 확 꽂히는 이름은 아니지만 다정히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에게 눈길이 가는 편이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목소리가 참 좋다.


 그래서 가끔은 당신에게 애칭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 말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부르던 애칭이 익숙해져 어색하다 말했다. 여자친구 이름이 어색하다니! 이 정도 간절함이 쌓이다 보니 무조건 이름을 불러주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커졌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니지만 비로소 '자기'라 부르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빠는 엄마의 이름을 부른다. 핸드폰에도 '영아'라고 저장되어 있어 가끔 아빠 차를 타다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내가 다 설레곤 했다. 아빠는 감사하게도 '현이 엄마'라고 부르진 않아 모종의 서운함이 조금 누그러졌었다. 동갑인 엄마 아빠는 서로를 '야', '너'라 부르지 않고 늘 두 분 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부른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이가 들어 주름은 깊어가도 한번 영아는 영원한 영아임을 아는 아빠의 로맨스가, 무심하지만 그런 아빠의 부름에 뒤돌아보는 엄마의 익숙함이.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을 담아 지어진 이름 석자가 나라는 사람을 가장 축약한 말임에 큰 의미를 더한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첫걸음이자 기억의 첫 페이지에 적히는 세글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달콤한 애칭을 가뿐히 제치고 나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별거 아닌 듯 별거인 연애를 하고 싶다.


 사랑을 하다 보면 참 별 거 아닌 게 엄청난 것이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 순간을 고대하며.


 서서히 완연한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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