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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Apr 02. 2023

11 미지의 당신에게 바통터치




 사랑에 대한 글을 쓰겠다 시작한 문장들 사이사이 아직도 당신들에 대한 핀잔이 가득하다. 아쉬움이 넘쳐난다. 두더지 게임처럼 당신들이 제각기 의도치 않은 순간 튀어 오르고 그중 행복했던 기억과 힘들었던 마음이 동시에 나타날 땐 고무망치로 힘껏 내리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신들을 미워한 감정조차 안개처럼 공간은 메우나 만져지지 않는 가시적인 감정임에 때때로 기억을 더듬어 겨우 떠올릴 때도 많다. 그만큼 나는 당신들을 그저 사랑했던 찰나이자 나의 청춘으로 기억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말일 줄 알지만 당신들을 미워한 날보다 사랑한 날이 훨씬 많았다고 단연코 말할 수 있기에 앞으로 쓰일 두서없는 글 속에도 여전히 잔류하는 미미한 애정을 엿볼 수 있을 거다. 완전한 끝이란 없다. 그저 어떤 모양으로 마음에 남겨둘지 각자가 저마다의 틀을 만들 뿐이다.


 나는 어렴풋이 세모의 모양으로 당신들을 남겨두었다. 평평한 부분을 지나 뾰족한 모서리에 이따금씩 따가울 때도 있고 또 묵묵히 살아가다 예기치 않은 순간 쿡쿡 마음을 찔려 씁쓸해할 때도 있었다. 시간의 연속성을 무시하듯 당신을 막론하고 나의 사랑들은 여전히 애틋하고 아쉽고 고맙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움도 잔류한다.



 지금에 와서야 당신들이 없는 무지에 당신들에 대한 미움을 써 내려가고 고마움을 고백해 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생각한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랑했다는 철저한 과거형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나를 떠올리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나를 말이다. 잔인하게도 그 순간을 흐릿하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낯선 이로부터 나를 소개할 때이다. 당신들 모두에게 타인이던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되어갔고 어느덧 평범한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던 그 긴 드라마의 첫 장면.


당신이 아직도 여전히 우리 집 앞에 서 있을 것 같은 날이 이리도 많은데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미련이 아니라 못난 익숙함이다. 친한 친구는 사랑 후 남은 감정도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 잊어가는 거라 말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이 다가오면 주저하지 말라 응원해 주었다. 당신이 머문 자리를 다른 색으로 다시 물들이는 과정이 이젠 더 이상 기쁘지만은 않다. 설렘 가득한 시작에 오두방정 떨 나이가 지난 걸까 설렘보다 걱정이 더 많다. 당신은 내게 이별이 아닌 영원이길 바라면서. 또 한 번 지독한 사랑을 눈 딱 감고 믿어보는 수밖에.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셈케이입니다’


 당신은 아직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미지의 인물이다. 연하는 결코 내 희망사항의 정반대 사항이라 꺼려왔지만 선배의 오랜 설득으로 당신을 소개 받기도 마음 먹었다. 사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과정 따위 무시한 채 당신은 나의 부족함마저 끌어안아줄 넉넉한 사람일까 우습게도 이 대목이 먼저 떠올랐다. 당신이 들으면 어이 없겠지만 나는 벚꽃을 같이 볼 누군가보다 인생을 같이 내다볼 누군가를 원하는 다소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사람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단단한 사람을 기다리는 내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줄까 혼자 드라마 16부작을 써 내려가다 스스로도 멍청하다 싶어 생각을 줄였다. 언제나 사랑은 내 예상을 빗나갔기에 애써 앞서나갈 필요 없다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다 또 문득 당신이 침투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 잘 잤어요?라는 달콤한 연락이 핸드폰 화면창에 뜨자 나는 미안하게도 내 마음에 여전히 바이러스처럼 남아있는 당신과의 처음이 떠올라 한동안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와 비교하고 싶지 않아도 일률적인 소개의 멘트들은 다시금 당신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의 열정 넘치던 처음이, 일주일에 서너 번 봐도 더 보고 싶어 하던 과분한 사랑이, 겁이 났다. 세상에 다양한 남자들이 어쩜 다 당신 같은 건 아닐까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잘 잤다는 답장을 한참 망설였다.


 이어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매일 아침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깰 줄 알았던 당시 묵직했던 약속이 구름처럼 사라지고 이름 석자와 멈춘 사진 몇 장뿐인 어쩌면 남과 같은 미지의 당신에게 나의 일상을 공유하는 지금이 다소 슬펐다. 헤어진 당신에게 돌아가 나 아무래도 너 없인 안 되겠다 울며 붙잡을 사랑은 더 이상 없음이 확실하다. 그저 감정이니까. 슬픔은 사랑이 넘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까. 나는 솟구치는 슬픔을 삼켜내고 궁금한게 참으로 많은 미지의 당신에게 하나 둘 답을 주었다. 고작 한살이지만 누나라는 점이 부담되지 않냐는 머쓱한 질문도 해보고 한살이면 차이도 아니라며 씩씩하게도 답하는 당신 덕에 나도 용기를 내야겠다 생각했다.


 미지의 당신과 또 어떤 모양의 사랑을 할지, 그저 한번 즐거운 식사로 인연을 끝낼지, 언젠가 그리워하는 글의 대상이 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딱 다섯 살만 어렸어도 아무 고민 없이 여러 사람 만나볼 의지가 강할 텐데 마치 이제는 견고한 그래서 쉽게 흩어지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강박이 생겨 미지의 당신에게 답을 보내면서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물론 다섯 살 어렸었던 때, 사진부터 내 스타일이 아니면 고려하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사진 대신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먼저 물었고 의젓하고 어른스럽다는 선배의 말에 마음을 먹게 되었다. 얼굴보다 사람 자체를 봐야 한다는 말,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미지의 당신은 일요일에 만나자 했다. 순간 옷장을 바라봐도 거울을 바라봐도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왕 용기를 냈다면 당신에게 조금은 욕심나는 여자가 되고 싶기에 나는 선약을 핑계로 한 주 늦춰 당신과의 첫 만남을 약속했다. 4월 1일, 거짓말처럼 나는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위해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나에겐 매번 까슬거린 순간이다. 당신이 미지의 당신에게 바통을 건네는 듯한, 나는 그 장면을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짜로 진짜로 당신은 이제 나에게 ‘사랑했다’의 존재가 되는 그런 순간이 된 것 같아서 말이다. 잘 지내는지 마음속으로도 더 이상 묻지 않으려 한다. 당신의 마지막 표정이 종종 나를 아프게 하지만 나는 씩씩하게 다시 일어나 내 인생의 새로운 ‘사랑한다’를 써보려 연필을 꺼내 들었다.


 사랑했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려 한다. 사랑과 이별을 오가며 때론 지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늘 새로운 당신을 꿈꾸는 내게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감정이다. 벌써 후덥지근 여름의 날씨 같은 4월이다. 미지의 당신을 만날 땐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밝은 청치마를 입어볼까? 신발은 아무래도 굽이 조금 있는 슬링백이 좋을 것 같다. 미지의 당신과 어떤 관계가 될지 몰라도 확실한 사실은, 당신 덕에 봄과 꽃과 함께 나도 서서히 움트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밥은 내가 사야겠다.


 ‘좋아요, 그럼 우리 5시에 거기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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