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로컬살이, 그 이후 4개월이 지났다.
로컬살이 마지막 날 밤, 사람들은 모두 불꽃놀이까지 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풍경은 조금 달랐다. 프로그램 수료식을 마친 뒤, 다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흩어졌다. 마치 헤어지기를 기다린 사람들 같았다. 심지어 수료식이 시작하기도 전 아침 일찍부터 짐을 싸서 차에 실어두고, 빨리 차를 뺄 수 있는 자리를 골라 주차해 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이 서운할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냐면, 나도 그랬기 때문에. 나도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탓에 살짝 졸리기도 했고, 이 나이에 무슨 수련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방이랑 화장실을 쓰는 게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 탓에 나도 빨리 나만의 침대에 눕고 싶었다.
다들 분주하게 고남면을 벗어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몇 시간 뒤에 다들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난 지금까지의 일들이 뭔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 50대쯤 되는 어머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집에 가면 다시 밥 해야 되는데, 집에 정말 가기 싫다! 여기서 누가 밥 챙겨주는 게 제일 좋았는데!" 덧붙이시길, 고남면에 오려고 일주일치 반찬이랑 밥을 다 만들어 두셨다고. 밥도 잔뜩 만들어 놓고, 일주일쯤 먹을 수 있는 썩지 않을 반찬을 다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고 메모까지 써두고 오셨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는 그냥 와도 괜찮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블로그도 하고, 인스타에 릴스까지 찍어서 올리는 힙한(?) 어머님이 집에서는 반찬과 밥 만드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어머님이 대답하시길, "당연히 안 되지. 이거 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밥이랑 반찬은 다 만들고 와야지."
그 말을 들으니 특별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 훌렁 고남으로 떠날 수 있었던 내 처지가 무척 자유롭게 느껴졌다. 지금 아니면 이렇게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 없겠구나, 이 시간이 무척 감사하게 주어진 시간이구나.
지난 글에도 말했지만 (로컬살이 일주일, 내게 생긴 변화 다섯 가지쯤 https://brunch.co.kr/@ilovesummer/155) 이 시간 동안 난 나에 대해 사소하지만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근데 지난 글에서는 말하지 않은, 나에 대해 깨달은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아직 참 많은 것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고, 새로운 것을 보면 신이 난다는 것.
사실 얼마 전까지 난 내가 싫어하는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기본적으로 말투 자체도 살짝 건조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사실 위주로 생각하고 '싫다/틀리다' 라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T라 미숙해서 그런걸까...?)
그래서 나 스스로 생각하길, '난 좀 싫어하는 게 많은 사람이구나.' 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어쩜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지, 일하다가 중간에 과자 먹는 것도 좋아하고, 바람 냄새도 좋아하고, 아침에 아무도 없는 길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MBTI 물어보는 것도 좋아한다. 심지어 그 대상이 MBTI를 모르는 어른들이라면, MBTI를 알려주는 것도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과자도, MBTI도, 바람도, 아무도 없는 아침에 길을 걷는 것도 다 예전부터 해오던 것들인데 난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많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에도 이것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저 지나쳤던 것이다.
아마 지금 퇴사하고 나한테 긍정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충전되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보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혹시 다시 나한테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는 있을 것 같다.
태안 고남면에서의 로컬살이가 끝나고 4개월쯤이 지났다. 4개월 동안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 경주, 진천, 서하, 감포(경주)에서 지냈고, 지금은 경주 시내 쪽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 시내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정도 지났지만, 사실 감포에서도 3주쯤 있었으니까, 경주에서 지낸 것이 벌써 한 달은 넘었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가족 여행 제외 국내 여행 경험이 거의 없었던 사람인데, 이제는 나름대로 경주에서 현지화가(?) 진행된 상태다. 행사 스태프로 단기 알바도 하고, 그걸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현지에 친구도 생겼다.
사실 35살의 나이에 왜 잘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재취업은 커녕 지방살이를 하고 있냐고 물으면, 내 답변으로 모두를 설득할 자신은 진짜 없다. 나조차도 애매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Q. 사회생활 10년 이상했으면, 이제는 진짜 커리어를 위해 달려야 하는 시기 아니야?
A. 맞긴한데, 10년 이상 했으니까 이제 잠깐 쉬어도 되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Q. 정확히 뭘 하고 싶어서 그렇게 지방에 살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A. 솔직히 이 답변은 진짜 하기가 힘들다. 일단 안 해봤던 거라서 재미있어서 하는 게 제일 크다. 근데 지금은 네이버 여행 인플루언서 신청하려고 여행 포스팅 열심히 올리고 있고, 중간중간 여행 상품 판매 링크도 걸어놓고, 매주 관심 분야 강의도 듣고 있다. 글쓰는 것도 꾸준히 하려고 하는 중이다.
나도 좀 더 뾰족한 답변을 찾고 싶은데, 그건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