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 국룰은 불꽃놀이
난 예전부터 <마지막>이라는 것을 경험할 때 제법 슬픔을 느끼는 편이었다.
사직서를 내고 내 발로 떠나는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도 여지없이 눈물이 났다. (심지어 속으로는 이 거지 같은 회사 퇴사하고 싶다고 100번은 넘게 외쳤던 회사인데도 말이다.) 함께 일하던 (사이좋았던) 동료들, 정들었던 자리, 그곳에서 보냈던 힘들면서도 성장한 시간들 때문일까? 마지막이라는 것이 시원하지만은 않았다.
더 시간을 거슬러보면,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 마지막 종강, 마지막 개강, 마지막 수업. 모든 것이 좀 먹먹하게 느껴졌다. 수능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4년 내내 재학 중인 학교를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그 간 정이 들어버렸는지 뭔지 떠난다는 게 사람의 기분을 참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 밖에 초중고 졸업식, 여행의 마지막 밤, 수련회 마지막 날, 친한 친구가 전학 가기 전 마지막 날. 내게 지금까지 <마지막>이라는 건 좀 슬픈 것이었다.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이라는 것에 각자 뭔가를 느끼고 있겠지만.
태안 고남면에 왔던 첫날, 집결 장소로 모인 그 순간 바로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거 집에 가고 싶은데?' (참고 : https://brunch.co.kr/@ilovesummer/139)
당장 시야에 들어온 분들은 모두 내 아버지 또래쯤이었으니,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한 10분쯤은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을 할지 말지 고민했었는데, 일주일쯤은 금방 지날 테니 잘 참아보자고 생각했었는데, 이 모든 것에도 결국 마지막이 찾아왔다.
마지막날 밤. 신기하게도 이 밤이 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나랑 너무 다른 사람들 같아서 낯설게 느껴졌다. 하던 일도 다르고, 나이도 너무 다르고(주로 너무 많으시고), 사는 지역도 겹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살아온 세상도 생각하는 것도 너무 달랐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있는 20대, 30대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만약 태안 고남면에서 월세를 내고 살아봐야 한다면 얼마까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나요?" 참가자 중 20대, 30대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내가 거의 맨 처음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하게 되었다.
난 한참을 고민했다. 주로 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월세와 보증금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몰랐다.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이 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기본 120~150만 원쯤 하는 것 같아서, 이것보다는 조금 더 낮게 불러야겠지 싶었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한 80만 원?"
내 대답이 경제센스가 많이 떨어지는 답변이었는지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당황스러워 난 답을 얼버무렸다. "아니... 좀 시설이 좋은 집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날 밤에 듣기로, 누군가는 이 답변을 좀 재수 없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저런 류의 이야기를 하면서 재수 없는(?) 대상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처음에는 이런 다름이 불편했는데 마지막 날 밤이 되니까 이 시간이 재미있고 좋아졌다.
나에게 생긴 변화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날이 날이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밖을 돌아다니면 수많은 날파리들이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소리 지르고 피하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음식에 내려앉아도 날파리를 치우고 먹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개구리를 보면 꺅꺅 거리며 도망쳤는데 귀여운 개구리를 보면 손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구경하고 앉아있을 정도가 되기도 했다. (근데 이 개구리는 유독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키우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무용한 것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다니, 놀랍다.)
예전에 나는 밤의 바다가 싫었다. 싫다기보다 무서웠다. 너무 막막하고 거대하고 어두웠다. 땅 위에 서있는데도 망망대해에 혼자 놓인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제는 바다가 바다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매일매일 손질한 어망과 그물을 뿌리고, 수확하고 그런 삶의 터전.
이런저런 아쉬움에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벽 늦은 시간이 되었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사실 그 간 오션뷰 숙소의 아침 눈뽕 + 2인 1실을 사용하는 불편함 때문에 난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사람이 없는 길을 돌아다니는 것의 즐거움을 서서히 알아가던 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밤에 일찍 자게 되었고, 핸드폰으로 쓸데없는 쇼츠와 릴스를 보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좋은 습관을 만들어준 것도, 무용한 것을 관찰하는 시간이 생긴 것도, 평소라면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다 고마워서 마지막이 아쉬웠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했겠지. 그래서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이런 불꽃놀이를 했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좋아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생생하다.
"이거 맞아?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나 이런 거 처음 해봐.",
"이장님,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이거 너무 재밌다!"
만약에 우리가 다 같이 20대, 30대였다면 불꽃놀이를 하는 시간이 이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들 각자 자리에서 어떻게 불꽃을 흔들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고,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우리가 원하는 사진이 나오는지도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다른 마지막들처럼, 태안 고남면에서의 마지막도 아쉬웠다.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