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모는 조금 힘들었다...
경주 감포에서의 2주가 시작되었다. 지난주에 말했던 것처럼 함께 할 참여자들의 절반 이상이 2000년 대생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03년생, 05년생이었다. 그 정도 되는 친구들과는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경험도 없었다.
대학 다닐 때 나이 많은 선배들을 보면 불편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살짝 걱정도 되었다. 포지셔닝이 잘못되면 영락없이 이모가 되는 건 아닐까?
난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빨리 입학, 졸업, 취업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어떤 집단에서 어린 편에 속해왔다. 지금은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어리진 않지만, 비슷한 직급과 협업이 많아서 주로 또래 교류가 많은 편이다. 잠깐 회사에서 팀장을 했을 때도 팀원 중 이 정도로 어린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몇 가지 희망적인 이유 덕분에 우린 전반적으로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첫째,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서로 닉네임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그 덕에 누가 몇 살이라는 생각보다 경주에서 질문 카드를 같이 만드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곳에서 포니였다.)
두 번째, 최근 몇 달 동안 백수로 지낸 덕에 난 모르는 밈도 없었고, 웬만한 아이돌 노래를 줄줄 꿰고 있었다. 덕분에 무슨 대화가 나와도 무리 없이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세 번째, 우리의 mbti 궁합이 최상이었다. 난 entj, 그들은 대부분 infp이었다. 이 둘이 천생연분 조합인데, 그래서 그런지 서로 대화가 잘 통하고 관심사도 비슷했다.
그들이 infp라서 내가 싫은데 티를 못 낸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나를 좋게 생각한 게 진심인지 여전히 살짝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은 내가 재밌다고 말해줬고, 함께 다양한 것들을 했다.
참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들과 놀다가 발톱이 빠져버릴 줄은...
눈물이 흘러 버릴 줄은...
달리기 하다 발톱이 빠지다니
난 달리기를 잘 못하지만, 달리기를 꽤 좋아한다. 그래서 보통 여행 갈 때 운동복과 달리기용 운동화를 따로 챙기는 편이다. 근데 경주 감포에 갈 때는 2주 치 짐이 너무 무거웠고, 고민하다 운동화를 챙기지 않았다. (좀 웃긴 게, 결국 읽지도 않은 책 세 권, 일기장 같은 것들을 빼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당시 뭔가 판단력이 마비된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감포에서 달리기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위안하며 감포에 도착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참가자들 중 한 명이 학창 시절 달리기 선수를 했을 정도로 달리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모두 다 같이 달리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난 그녀와 함께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운동화가 없지 않은가.
운동화가 없다는 내 말을 듣고 어떤 참여자들은,
"아, 저도 없는데 그냥 대충 크록스 신고 달리게요."라고 했다.
나도 슬리퍼가 있었기 때문에 잠시 대충 신고 달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 도가니, 내 무릎, 내 아치는 03~05년생들의 그것과는 연식이 다르지 않은가. 괜히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다가는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이란 강한 예감이 있었다.
난 그들과 함께 달리기 위해 황급히 쿠팡으로 운동화를 하나 주문했다. 로켓배송이 되지 않아서 이틀 뒤에나 운동화가 도착했다. 두근거리며 운동화를 신어봤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운동화가 살짝 짧았다. 발톱이 운동화에 닿아서 신을 때 살짝 통증이 있었다.
좀 거슬리긴 했지만 슬리퍼보다는 운동화가 나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바다 옆에서 멋진 러닝을... 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러닝을 하는 건 조금 색다른 경험이었다. 조금 오버해서 황홀한 느낌도 들었다. 내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 착각에 빠져 난 열심히 달렸다. 일종의 아드레날린 중독이었을까?
난 원래 달리기도 못하고 + 체력도 원래 많이 안 좋은 저질 체력이고 +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도 많고 + 운동화도 작은 여러 악재를 아드레날린으로 이겨냈다. 내가 열심히 달리기를 하자 05년생 친구가 "포니, 잘 뛰는데요? 페이스 더 올려볼까요?"라며 칭찬했다.
그녀의 칭찬에 난 페이스를 올렸다. 런데이에 찍힌 기록에 따르면, 거의 역대 최고의 페이스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극도의 몸살 때문에 결국 병원에서 수액을 맞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확인해 보니, 발톱까지는 아드레날린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발톱이 검게 멍들어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발톱은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 괜히 성급하게 구매해서 맞지도 않는 운동화 7만원
- 아파서 맞은 수액 4만원
- 결국 죽어버린 왼쪽 엄지 발톱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