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전까지 미영이는 방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삐리릭’ 하는 잠금장치 소리에 깨어 문앞으로 달려나가 남자친구를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곤히 자고있는 그녀를 깨우기 싫어 조용히 나가려던 남자는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멈춰 버렸다.
미영이의 심장은 이미 전력 질주를 한것같이 빠르게 뛰고 있었으며 둘곳 없는 손은 심장을 따라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듯 힘없이 주저 앉고 말았다.
30년이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5살짜리 어린아이로 만든다.
초등학교 입학전 아니, 그보다 훨씬 어렸을적 미영이는 잠시 이모라 불리던 엄마의 친구 집에 맡겨진적이있다.
그 곳에서도 눈치가 안보이는건 아니였다.
하지만 이전에 친척집 보다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순미씨의 욕을 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엄마가 자신을 자주 만나러 와줄수있는 것에 어린 미영이는 안도했다.
어느 오후 미영이의 시계가 늙은 지팡이처럼 도무지 움직이지 않던 날이다.
"바늘이 언제 2에 도착해요? 너무 느리게가요."
"동화책 한번만 더 읽으면 엄마가 올거야 . 그러니까 시계앞에는 그만 앉아있자 미영아."
주방에서 잡채를 만들고 있던 이모라는 사람이 답해주었다.
이모 말에 미영이는 얌전히 '인조인간 원숭이'라는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한다.
바늘이 그토록 움직이지 않던 이유는 오늘이 미영이가 실컷 어리광을 부리려고 기다린 날 이였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가 주인공이 되고, 순미씨의 품에 안겨 실컷 투정도 부릴수 있는 그런 날.
달에 한번 순미씨가 이모에게 일명 양육비를 주기위해 흰봉투에 만원짜리를 두툼하게 채워 미영이를 만나러 오는 날이였다.
"미영아!"
문밖으로 부터 순미씨의 밝고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읽고 있던 동화책은 덮어둔채 미영이는 좁은 집안을 까치 같은 작은 발로 총총총 현관까지 뛰어간다.
문을열자 보이는건 순미씨와 옆에있는 캐리어에 담긴 바비인형셋트 그리고 책과 옷가지등 미영이의 선물들이였다.
신이난 미영이는 한손엔 캐리어를, 다른 손으로는 순미씨의 옷자락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순미씨와 이모가 이야기를 나누며 상을 차릴동안 미영이는 선물들을 풀어보다 바비인형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꼬옥 안고는 작은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오랜만에 솜씨를 뽐낸 이모의 상차림엔 잡채와 갈비등 미영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하교후 돌아온 오빠와 함께 네명이서 함께 식사를 마친후, 식구들은 거실에 모여 다같이 미영이의 재롱잔치를 봐주었다.
바비인형의 셋트인 아동용옷을 입으며 공주님이 되어버린 미영이가 기분이 좋아 순미씨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던 미영이는 점점 눈이 감기기 시작했고, 그건 순미씨가 떠나야 한다는 신호와 같은 것 이였다.
눈치라면 밥먹듯 먹고 자란 미영이는 무엇인가 느낀건지 반쯤 감긴 눈으로도 가지말라며 자꾸만 한손으로 순미씨의 팔을 붙들었다.
"엄마 아직 안가 하룻밤 더있다 갈거야.미영이 자고 일어나도 엄마 있을거야."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순미씨가 말한다.
"정말..? 나 자고 일어나도 엄마 있어..?"
이제는 눈이 다 감긴 미영이가 재차 물어본다.
"그럼. 그러니까 얼른 한숨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미영이의 새액새액 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올뿐.
그리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땐 이미 순미씨는 다시 본인이 속한 세상으로 떠나버린 뒤였고,미영이의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된 트라우마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영에게 끝이 보이지않는 기다림만을 남겨 두었다.
“ 엄마 안갈거야” 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