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이가 이곳에서 보낸 날들이 어느덧 몇해가 지나갈 무렵, 모두가 잠들었던 새벽 전화가 울렸다.
전화소리는 크게 울렸지만 신기하게도 언니와 오빠는 깨지않았고 미영가 전화를 받게됬다.
순미씨였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술에 취한듯한 순미씨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리고 집앞으로 잠시만 나오라는 한마디에, 미영이는 잠결에 잠옷만 입은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빌라 앞에 있는 가파른 계단에 앉아 기다리던 순미씨의 뒷모습은 어렸던 미영이의 눈에도 너무 작아 보였다.
순미씨의 옆에는 호일로 싼 김밥 한 줄과 사이다캔 하나가 있었다.
옆에 앉은 미영에게도 입에 한알을 넣어주었는데, 추웠던 날씨 덕에 김밥은 살짝 굳어있었고 사이다 또한 잡고있기에는 너무 차가웠다.
늘 올라가기 힘들었던 그 언덕 같던 계단에 모녀 둘이 앉아 추운것도 잊은채 김밥 한줄을 나눠 먹으며 미영은 생각했다.
이순간 엄마와 함께있음에 참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눈은 계속 김밥쪽을 향했다
김밥을 다 먹으면 순미씨가 떠나가 버릴까.
호일에 싸인 김밥이 한 알씩 줄어들수록 불안해져 미영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다.
미영은 당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건 차갑던 김밥과 사이다, 그리고 따뜻했던 순미씨의 품.
김밥을 마저 다 먹은 순미씨는 미영에게 흰 봉투를 건내더니 집으로 들어가라 말했다.
흰 봉투에는 미영이를 위해 매달 보내던 양육비가 두텁게 채워져있었다.
순미씨가 가버릴까 먹는동안에도 계속 불안했었던 미영이는 헤어질 시간이라는걸 느끼고는,이내 같이 가면안되냐고 울며 불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가슴이 내려앉았을 순미씨.
자식을 남기고 가는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을 이해하기에 미영이는 너무 어렸다.
따라 갈수도 없었고 더이상 가지말라 말 할수도 없었던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던 미영이는, 순미씨가 계단을 내려가 언덕 아래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빌라 앞에 서서 지켜보다 손에 쥐어준 봉투를 손에 꼭 움켜쥔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건 되돌아본 나의 어릴적 이야기.
하지만 되돌아 갈수 없는 그 시절 이야기.
그날의 엄마와 내 나이가 비슷해진 지금, 이제 조금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고된 삶이 너무 지쳤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보고 살아갈 이유를, 힘을 얻고 싶었을 나의 엄마.
자신의 식사는 김밥 한줄로 때워도 매달 양육비와 별개로 다같이 고기라도 먹으라며 언니에게 따로 용돈을 보내주었던 서른 여덟살 짜리 어린 엄마.
만약 한번 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에게 꼭 말해주고싶다.
“ 나 괜찮아. 기다리는건 힘들지 않아. 그것보다 엄마가 못챙겨 먹는게 더 속상해.
그러니까 밥좀 잘 챙겨먹어. 김밥 같은거 말고.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참 좋아.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