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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옥빛 미르(5)

 며칠 후 또 다른 구매자가 찾아왔다. 이번에 찾아온 일행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부산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나이는 50을 넘겨보였고 나이에 비해 백발이 많았다.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발라 뒤로 넘겼고 양장으로 깔끔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과 아집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를 대동하고 온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양복쟁이 남자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였고 대조적으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두루마기 노인은 항상 양복쟁이 앞에서 이야기를 주도했고 양복쟁이는 노인 뒤에 한 발짝 물러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우물 속 옥빛 동물을 본 이 들의 반응도 첫 번째 방문자인 한 박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그 동물의 광채 나는 옥빛 비늘에 압도당했고 이런 동물이 과연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러나 두루마기 노인은 한 박사가 이 동물을 보며 분석한 생물학적인 분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동물을 관찰했고 그의 견해도 한 박사의 것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이미 이 동물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비늘 색이 녹색과 가까운 옥빛이므로 이 놈이 다 자라면 청색 비늘을 가진 교룡이 될 게요. 교룡은 모양이 뱀과 같고 길이가 30자를 넘으며 뿔과 비늘이 있고 네 개의 넓적하고 짧은 발을 가졌소. 비늘이 빽빽한 것으로 보아 이 놈은 새끼 수컷이요”

두루마기 노인은 이 미지의 동물을 용의 새끼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 씨는 놀라서 그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진지했고 흥분해서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아니 노인장, 그럼 정말 이 동물이 용의 새끼란 말이요? 용은 전설 속 상상의 동물인데 어찌 세상에 있을 수 있단 말이요?”

김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노인의 얼굴과 우물 속 동물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오만 과거 중국에는 실제 용을 봤다는 기록이 많이 전해지고 있소. 다 자란 용이 현재 세상에 보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이렇게 어린 새끼용은 땅 속에 알로 있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지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죠. 이 녀석들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영물이니까”

 김 씨는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 동물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들과도 다르다는 것은 한 박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기에 노인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실의 진위 여부는 김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좋은 값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용 얘기를 할 때도 뒷짐을 지고 아무 말이 없던 양복쟁이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천궁 선생, 그게 확실하다면 이 동물의 지금 상태는 어떻소? 어린  용도 효과가 있겠소?” 

 양복쟁이 남자가 지칭한 천궁 선생은 아마 이 두루마기 노인을 이르는 말인 듯 싶었다. 

“이 용 새끼의 옥빛 광채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보다는 아마도 빛을 많이 잃었을 것이요. 이런 영물이 사람 손을 타게 되면 기운이 약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아직 염려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 군요.”

김 씨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놈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이요?”

천궁 선생은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예로부터 용뇌는 만병통치약으로서 악귀나 재앙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효용이 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아주 귀한 보물로 여겼지요. 실제 용을 구할 수가 있다면 그 가치는...”

이 때 양복쟁이가 천공의 말을 막고 김 씨에게 제안했다.

“내 3일 후에 돈을 가지고 다시 여길 오겠소. 이 동물은 내가 살 테니 당신은 다른 구매자일랑 절대 접촉하지 마시오...오늘은 계약금조로 구매가의 10분지 1을 두고 가겠소.”

잠시 후 양복쟁이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수표를 꺼내 김 씨에게 건넸다. 김 씨는 수표에 적힌 액수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즈음, 남 포수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옥빛 동물이 잘 있는지 적당한 구매자가 나타났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괴산 읍내에 며칠 머무를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그 동안 산에서 채집했던 약초바구니와 사냥한 짐승들을 장에 팔 요량으로 지게에 싣고 총도 챙겼다. 며칠 집을 비울 때는 항상 총을 소지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는 먼저 김 씨네 집에 들러 우물 속에 있는 동물을 살폈다. 옥빛 동물은 눈에 띠게 활동이 둔화되어 있었고 밝게 빛나던 옥빛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갈기에 비치는 검은 빛이 더 번져 등 부위가 먹빛으로 변해 있었다. 남 포수는 겁이 덜컥 났다. 20년 전 죽었던 암컷도 죽은 후에는 몸통이 온통 먹빛으로 변했던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 씨네 점포로 달려가 그를 만났다. 남 포수를 맞는 김 씨의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아 조카 왔는가? 일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네. 이제 내일이면 동물을 살 작자가 돈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올 것이고 자네는 한 밑천 두둑히 마련할 수 있을 걸세. 이주해서 읍내에 정착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거야”  

“아재...그렇지만 동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 비늘 색깔이 먹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어요”

“신경 쓸 거 없으이. 이번에 나타난 작자는 어차피 그 녀석을 죽여서 몸보신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죽거나 살거나 문제될 게 없어”

 김 씨는 양복쟁이 남자가 제안한 액수를 남 포수에게 알려주며 그의 걱정을 잠재우려 했지만 남 포수의 불안한 마음은 좀 체로 가라앉지 않았다. 남 포수는 원래의 계획대로 읍내에서 거래가 끝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김 씨도 그게 좋겠다며 창고에 딸린 작은 방을 남 포수가 머물 곳으로 제공해 주었다. 

 남 포수가 용두리 마을을 떠날 때부터 내리던 비가 하루종일 그치지 않았고 밤이 되면서 부터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남 포수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년 전 아버지가 땅을 치며 외쳤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내가 욕심을 부려 영물을 죽인 게야...그 벌로 마을사람이 죽고 네 어미가 죽었다.’ 

 남 포수는 벌떡 일어났다. 마당으로 달려 나가 우물의 덮개를 열었다. 희미하게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남 포수는 손전등을 비추어 동물을 살폈다. 몸 전체가 먹빛이었고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남 포수의 마음은 공포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금의 폭우라면 섬처럼 고립된 용두리 마을이 위험했다. 오솔길과 연결된 길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릴 정도의 폭우였고 마을 주민은 꼼짝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20년 전 어린 그의 눈에 비쳤던 비극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남 포수는 창고 안에서 서둘러 뜰채를 가져왔다. 몸을 숙이고 뜰채를 내려 옥빛 동물을 건져내려 하였다. 그러나 뜰채가 짧아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동물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남 포수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입이 타고 갈증이 났다. 그는 벽을 짚어 우물을 넘었다. 우물 안쪽 벽을 양손으로 짚으며 조심스레 물로 내려갔다. 다행히 우물 벽은 높지 않았고 수심도 깊지 않았다. 이런 좁은 우물 속에 갇혀 있었으니 동물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이 당연하리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우물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수심은 가슴까지 찼다. 남 포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난 후 물 속으로 잠수하여 뜰채 안으로 동물의 몸을 밀어 넣었다. 먹빛 동물은 희미한 울음소리를 낼 뿐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이제 우물을 오를 일이 문제였다. 남 포수는 양발을 우물 벽에 대각선으로 딛고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손엔 뜰채의 망과 손잡이가 만나는 부분을 부여잡고 한 발씩 디디며 우물을 올랐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그의 전진을 방해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우물 벽 꼭대기까지 올라 뜰채를 밖으로 넘겼다. 이윽고 몸까지 우물 밖으로 나온 후에 뜰채 안에 있던 동물을 살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동물에게는 세차게 내리는 빗물을 직접 맞는 것이 우물에 갖혀 있을 때 보다 나은 듯 보였다. 그 때였다. 갑자기 개짓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날카롭게 울려 퍼져왔다. 남 포수는 서둘러야 했다. 한 시간만 더 이렇게 비가 내린다면 용두리 마을이 수몰되고 말 것이었다. 지게를 가져와 뜰채에 있는 그대로 동물을 얹었다. 그는 창고 안에 두었던 총을 젖지 않게 이불 덮개로 싸고 어깨에 둘러멨다. 밖으로 나와 지게를 메고 달렸다. 어디로 가야할 지는 정해졌다. 계곡에는 이미 물이 들어차 있으므로 물이 들어 있는 어느 곳이라도 닿으면 되었다. 읍내로부터 계곡까지는 십리 길이었다. 지게를 짊어지고 달리는 그의 뒤로 검은 세퍼트가 무시무시한 소리로 짖어대며 빗속에서 날 뛰며 목줄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남 포수는 맨발이었다. 우물 속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 던졌던 것이다. 돌부리가 발에 채이고 빗물과 땀이 섞여 범벅이 되었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내를 빠져나와 산속 길로 접어들면서 발에 채이는 돌부리는 더 많아졌다. 비 내리는 산속 길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나무이고 수풀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세차게 갈기는 나무줄기와 가시덤불이 달리는 그의 얼굴에 달려들었다. 십 리쯤 달렸을까 계곡을 채운 넓은 물바다가 거의 닿을 듯이 보였다. 남 포수는 힘을 냈다. 그러나 멀리서 들렸던 검은 세퍼트의 울부짓는 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마도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깬 김 씨가 동물의 도난을 확인하고 도둑을 잡기 위해 개를 풀었나 보다. 남 포수는 걸음을 멈추고 지게를 내렸다. 뜰채 속 동물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아직 죽진 않았다. 이 동물의 죽음은 마을의 비극과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남 포수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어깨에 두른 총을 내리고 이불싸개를 벗겼다. 남 포수는 장전을 하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총구를 돌렸다. 주위는 어둡고 캄캄하여 코앞의 나무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비까지 내려 이 상황에서 달려오는 맹수를 명중시키기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남 포수는 심호흡을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한 방이다. 한 방에 맞추지 못한다면 저 맹수는 나를 뛰어넘어 곧바로 뜰채 속의 동물에게 달려들어 그의 명줄을 물어 뜯고 말 것이다.’

맹수처럼 으르렁 대며 쫓아오던 세퍼트가 지척에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울부짖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죽음과도 같은 고요한 적막 속에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남 포수가 순간적으로 살기를 느낀 찰나 갑작스레 정면으로 뛰어오르는 커다란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 때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주위가 옥빛광채로 순간적으로 환하게 밝아졌고 공중에 떠있는 검은 맹수의 형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 포수는 방아쇠를 당겼다. 세퍼트는 깨갱 하며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고 남 포수의 가랑이 사이에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깜짝 놀란 남 포수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옆에 내려놓은 뜰채 속 동물 쪽으로 눈을 돌렸다. 먹빛으로 변해가던 비늘이 순간적으로 옥빛 광채를 발하더니 다시 사위어갔다. 남 포수는 숨을 헐떡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지체할 수가 없었다. 총을 둘러메고 지게에 옥빛 동물을 얹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물가에 도착했다. 지게를 벗고 뜰채를 내리고 옥빛 동물을 조용히 물속에 풀었다. 옥빛 미르는 물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어 보이더니 천천히 헤엄쳐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먹빛의 비늘이 옥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 포수는 20년 전 아버지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라져가는 옥빛 미르에 큰 절을 했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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