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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비밀 투표(1)

 우리 팀을 소개하기 전에 나에 대해 잠깐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을 거 같네요. 이 글에서 나를 직접 소개할 기회는 지금이 아니면 없을 거 같아서요. 누군가 나를 멋지게 소개해주면 좋겠지만 이 이야기를 끌고 갈 사람이 어차피 나라서, 쑥스럽지만 내 얘기를 조금 할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먼저 내가 다니는 회사에 대해 말하자면, 회사라고 하면 좀 우습지만, 어쨌든 공개적으로 우리 회사를 노출시키는 것은 좋지 않을 거 같아서, 그냥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회사쯤으로 해둘 게요.ㅎㅎ. 좀 거창하죠?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고 국민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죠? 나는 20대 후반에 이 회사에 들어와서 일하다가 육아를 위해 잠시 휴직하고 올 해 2월에 복직을 했답니다. 

 오랜 휴직 후에 복직이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특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그렇지만 뭐 나는 항상 잘 웃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유머감각도 출중하고 무엇보다 빛나는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ㅋㅋ 금방 적응할 자신이 있었어요. 남들은 나를 보고 엉뚱하다, 사차원이다, 맥락없다, 마스크를 쓴 얼굴이 지나치게 손해다 등등의 평을 하지만 그러다가도 나의 마법 같은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나와 얘기하고 싶어 하고 결국에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더라구요.ㅎㅎ. 나는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서 전달할 뿐이에요. 자, 더 이상 내 자랑을 하면 얘기가 길어지니까 내 소개는 요기까지만 하고 이제 우리 팀을 소개할게요.     

 우리 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것은 이 이야기에 그닥 중요하지 않을 거 같아서 생략하고 그 대신 우리 팀원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할거 같네요. 사실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우리 팀원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예요. 한가지 양해를 바라는 것은, 팀원들을 소개할 때 외모에 대한 묘사 만큼은 생략하거나 간략하게만 할 게요. 생김새도 성격만큼 참 가지가지고, 그 인물의 특징을 묘사할 때 훨씬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차마 여기에서 외모 묘사까지 한다면 나중에 큰 원망을 들을 것만 같아요. 그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랄 게요.     

 우리 팀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건 아마 점심식사일 거예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회사 근처에 있는 바깥식당에서 점심을 먹곤 하는 데요. 이 점심 행사가 제법 거창해요. 메뉴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이동할지 후식으로 무엇을 먹을지 하는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진지해서 하루일정 중 무시할 수 없는 행사가 되었답니다. 하긴 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까요. 특히, 내 앞쪽에 앉아 있는 손 주임님은 점심시간이 끝나면 하루의 낙이 지나가버렸다고 한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손 주임님에 대해 더 얘기해보면, 이 분은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겼는데 먹는 거에 참 진심인 분이에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좀 우락부락한 면이 있고 과묵해보여서 먹는 거 따위 관심 없어 하는 표정이지만 점심메뉴에 은근 민감하고 관심이 많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팀에서 미스테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이기도 해요. 뭐 나만큼 사차원은 아닌데, 뭐랄까 반전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가까이 보고 한참 보아야 정체를 드러내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 분이 꼭 그런 분이에요. 별로 말은 없는 편인데, 점심시간만 되면 활기가 넘치고 물망에 오른 모든 점심 메뉴에 진심이 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급변한답니다. 이 분은 특히 부대찌개나 국물요리에 라면사리를 추가하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꼰대 입맛을 가지고 있어요. 입맛이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연륜 탓으로 보이기도 해요. 왜냐하면요. 놀라지 마세요 이 분은 무려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에 우리 회사에 들어왔어요. 본인 말로는 부조리한 사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좀 단출하게 인생2막을 시작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말은 거창하지만 진짜 속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암튼 실없는 농담을 내 뱉기도 하지만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말 붙이기가 쉽진 않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아저씨에게는 손 주임님이라고 왠지 님자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있답니다. 간혹 우리끼리 모여 얘기할 때 가끔 끼어들어 말을 섞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흉보는 최 팀장을 두둔하기도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되새겨보면 맞는 말일 때가 많거든요? 무조건 꼰대로 치부하기엔 뭔가 반전을 갖고 있는 아저씨에요. 허구한 날 회사에서 지급한 까만 색 오리털 잠바를 입고 다니며 의자 등받이를 뒤로 한껏 젖히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게 주특기에요. 손 주임님이 공공의 적인 최 팀장을 두둔하는 건 아마 최 팀장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낸 세대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봐요.

 다음으로 우리 팀의 팀장, 최 팀장에 대해 얘기해 볼 게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손 주임님보다도 5년은 더 연배가 위일 거예요. 퇴직까지 몇 년 안 남았고 들리는 소문으로 1년 내로 조기 퇴직 신청을 한다는 말도 돌고 있죠. 내가 복직했을 때만 해도 승진에 대한 미련이 있어 보였는데 요즘은 거의 포기한 거 같아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늦게 배운 골프에만 코를 빠뜨리고 있답니다. 우리 팀원 대부분은 최 팀장을 공공의 적으로 여기고 있어요. 뭐 자업자득인 면이 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꼰대스러우면서도 꼰대로 인식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거죠. 팀원들이 최 팀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꼰대 짓을 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의외로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 아 근데 이 원칙주의가 일관성이 없는 원칙이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게 문제에요. 정작 원칙을 적용해야 할 부분은 그냥 지나가고 그냥 지나가도 무방한 사소한 것에는 원칙의 잣대를 철저하게 들이대서 종잡을 수가 없다는 거죠. 원칙주의자라면 아랫사람들이 대충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그 예측을 모두 빗나가 버린다는 게 문제인 거죠. 더군다나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 그 원칙은 무자비하게 철저해서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답니다. 한 때 최 팀장을 두둔하고 호응했던 손 주임님이 팀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도 이 종잡을 수 없는 원칙 때문인데요.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최 팀장이 자신의 원칙에 입각해서 손 주임님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고 손 주임님은 또 만인의 원칙에 입각해서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죠. 불꽃이 튀는 순간이었어요. 두 꼰대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목소리를 높였고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태까지 발전했고 어느 원칙이 맞는 것인지 결판이 나야만 할 상황으로 전개 되었죠. 그러나 일촉즉발의 그 아슬아슬한 상황은 의외로 흐지부지 옆 팀의 비슷한 연배의 꼰대 아저씨가 옥상 휴게실 담배 회담을 중재함으로써 끝이 났죠. 둘 다 사태를 키우기에는 나이가 부담이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에요. 젊은 사람들 보기에 좀 민망하잖아요? 아무튼 그 사건 이후 손 주임님은 최 팀장과 틀어졌고 공공의 적을 성토하는 우리들과 합세하게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둘 간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 없진 않아요. 그건 점심메뉴와 회식메뉴를 정할 때인데요. 꼰대 입맛으로 공감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부분이랍니다. 

 최 팀장에 대해 뒷담화할 얘기는 무궁무진하지만 다른 팀원들도 소개해야 하고 또 최 팀장을 주인공인양 지면을 많이 할애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넘어 갈게요. 그 리얼 꼰대는 하여간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며 약자에겐 군림하고 강자에겐 비굴한 성격이에요.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그와 친분을 쌓고 있는 사람은 임 계장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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