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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Oct 13. 2023

비밀 투표(3)

 팀원들 소개하느라 너무 지면을 많이 할애한 거 같네요. 이제 지난 주에 벌어졌던 비밀투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매년 지급하는 성과급 때문인데요. 우리 회사는 1년에 한번 씩 성과급을 지급하는 제도가 있어요. 아마 다른 민간 회사들도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암튼 1년마다 지급되는 성과급은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데 가장 우수한 등급은 S등급이고 성과급도 가장 많이 받게 된답니다. 문제는 S등급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로 제한된다는 거예요. 우리 팀에서도 한 명만 S등급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제한되었어요. 사실 누구를 S등급으로 추천할 것인가는 팀장의 고유 권한인데, 원칙적으로, 팀장은 팀원들의 1년간의 업무실적을 공정하게 평가해서 가장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여 상신해야 되는 것이죠. 

 팀의 여론이란 것은 대개 객관적으로 의견이 수렴되기 마련이고 간혹 저항과 불수용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죠. 성과급 시즌이 다가올 즈음에 팀원들은 올해는 누가 S등급을 받을지 나름대로 평점을 매기며 누군가로 의견이 모아지게 됩니다. 누가 열심히 일했는지 옆자리 동료는 다 알게 마련이거든요. 팀원의 과반수 이상은 아마 성실하고 전문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냈던 남 계장을 상정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팀장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던 모양이에요. 우리도 뭐 예상은 했지만 비밀투표라는 방법까지 동원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던 거죠. 

최 팀장은 임 계장에게 S등급을 주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렇다면 그냥 자신의 권한으로 그렇게 결정하면 간단한 일 아니겠어요? 물론 팀원들의 불만과 특히 남 계장의 불만이 크겠지만요. 팀장은 그런 원성과 불만을 받고 싶지 않았던 거죠. 누구보다 꼰대이면서 누구보다 꼰대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심사가 작용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비겁한 꼼수를 생각해 낸 겁니다. 

 자신은 팀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해서 올해 S등급 선정자는 팀원들의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이 득표하는 사람으로 선정하겠다. 투표는 철저하게 비밀투표로 진행하겠다 라고 선포한 거죠. 나름 공정하고 민주적인 절차 같아 보이죠? 그렇지만 팀장은 임 계장이 다 득표 할 수 있는 꼼수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투표 일은 다가왔고 퇴근하기 한 시간 전에 투표를 하기로 정해졌어요. 나는 점심을 먹고 쉬고 있다가 갑자기 투표가 어찌 될지 궁금해졌어요. 보통처럼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까만 잠바 아저씨에게 메신저를 보냈죠.   

“주임님. 오늘 투표 결과가 어찌 될까요?”

“......” 

손 주임님은 딴 생각에 잠겨 있어서 내 메신저 톡을 보지 못하고 있었죠. 나는 평소 손 주임님이 예리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있어서 오늘의 투표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나는 남 계장이나 임 계장 둘 중의 한사람이 다 득표할 것이라 예상했거든요. 난 앞 자리 손 주임님을 소리 내어 불러서 컴퓨터 화면 좀 보라고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어요. 잠시 후 손 주임님에게 답장이 왔답니다. 

“정 주임이 뽑힐 거야” 

“엥? 정 주임이요? 왜요?”

“......”

나는 황당한 손 주임님의 답장을 보고 재차 물었지만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손 주임님의 엉뚱한 답변을 듣고 나는 좀 실망을 했답니다. 미스테리한 인물이지만 나름 생각이 깊은 아저씨로 좋게 점수를 주었던 손 주임님을 평가절하하기로 마음먹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정 주임이 S등급자로 낙점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최 팀장을 포함해 팀원들은 모두 내가 나누어준 쪽지에 후보자를 적어냈고 투표는 5분도 안되어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회의실로 모였고 최 팀장은 쪽지 7장을 받아 들고 하나씩 개표를 시작했습니다. 

“남 계장, 임 계장, 정 주임, 남 계장......”

쪽지 4개를 개표한 최 팀장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어요. 남 계장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모양이었죠. 나머지 쪽지 3개도 개표를 마저 진행했습니다. 개표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끝이 났지만요.

“정 주임, 정주임, 임 계장.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급기야 팀장은 부정투표를 의심하며 얼굴이 붉어졌지만 결과는 정 주임의 다 득표로 결정이 났답니다. 임 계장 2표, 남 계장 2표, 정 주임 3표. 정 주임은 예상외의 결과에 감추려는 기색없이 박수를 치고 깔깔대며 좋아했고 손 주임님은 무표정으로 일관, 임 계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남 계장의 얼굴에도 아무 표정이 없었습니다. 최 팀장은 이 주임 쪽을 노려보며,

“이 주임,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하며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글쎄요. 전 제대로 투표했는데요”

까만 얼굴의 이 주임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결국 그날의 투표는 이렇게 끝이 났고 우리 팀의 S등급 선정자는 정 주임으로 낙점되는 기가 막힌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최 팀장은 자신이 선포한 방식을 차마 물리는 것까진 할 수 없어서 투표결과로 선정된 정 주임을 S등급 자로 결재 상신하게 되었답니다. 투표가 치러진 이튿날, 나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손 주임님에게 다시 메신저를 날렸습니다. 

“주임님, 도대체 정 주임이 될지 어떻게 아신 거에요?”

“허허...많이 알면 다쳐요”

손 주임님은 의자 등받이를 당길 생각 없이 기지개를 펴며 뜸을 들이고 있었어요.

“좀 알려주세요. 네?”

계속해서 다그치는 나의 추궁에 손 주임님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이 추리한 내용을 알려주었답니다. 손 주임님의 설명에 의하면,

 임 계장이 얻을 표는 최 팀장 1표, 임 계장 자신의 1표, 이렇게 최소한 2표는 확보할 것이라는 것을 최 팀장도 예상하고 있었고 좀 더 확실한 득표를 위해 최 팀장은 자신의 밥인 이 주임에게 임 계장에게 투표하라고 회유와 압박을 했다는 거죠, 팀장은 평소대로라면 이 주임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이렇게 되면 임 계장은 3표는 확보할 수 있고 정 주임이나 내가 남 계장보다는 임 계장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임이 팀장이 시키는 대로 임 계장에게 투표하지 않고 남 계장에게 투표하며 반란표를 던진 것이죠. 나는 이 주임이 반란표 던질 것을 어떻게 손 주임님이 알 수 있었냐고 물었죠. 

“사실 이 주임이 나에게 얘기 하더라구. 최 팀장이 자신에게 임 계장에게 투표하라고 시켰다구. 근데, 자기는 이번에는 말 안들을 거라구. 어차피 휴직할 거니까 뒤통수 한번 치고 가겠다구 ㅋㅋㅋ 그래서 알게 됐지”

 이렇게 해서 임 계장은 2표만을 얻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궁금한 건 그럼 남 계장은 왜 2표만 얻게 된 걸까요? 손 주임님의 설명에 의하면, 남 계장은 이 주임에게 한 표를 얻을 것이구 그리구...내가 남 계장에게 투표했을 거라구 하네요. 사실 이 말을 듣고 깜놀했어요 실제로 내가 남 계장에게 투표를 했거든요. 손 주임님은 내가 나름 공정에 대한 잣대를 갖고 있고 그 잣대에 의해 점심을 가끔 사준 임 계장에게 투표하기 보다는 성실하게 일하는 남 계장에게 투표할 거라는 걸 간파한 거죠. 나 사실 많이 놀랐어요. 이 아저씨 보통이 아니죠? 그런데 이 아저씨의 추리력이 더 놀라운 건 남 계장의 마음을 읽었다는 거에요. 이 주임과 나, 이렇게 해서 2표를 확보한 남 계장은 자신에게 한 표를 던졌으면 당첨! 인데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투표를 한 거죠. 손 주임님의 심리 분석(?)에 따르면, 남 계장은 임 계장을 추천하려는 최 팀장의 의도를 알고 있어서 그를 거역하고 자신이 S등급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또 한편으로 S등급을 받은 후 그에 걸맞게 과다한 업무가 할당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1표를 포기하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이벌인 임 계장에게 투표하긴 싫었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장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 정 주임에게 투표할 것이란 걸 예상한 거였죠. 놀라움의 연속이죠? 이렇게 해서 남 계장은 2표를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정 주임의 3표 획득인데요. 남 계장에게 1표를 얻은 정 주임이 어떻게 2표를 더 얻게 된 걸까요? 

 손 주임님은 정 주임이 찾아와 자신에게 투표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선정되면 성과급의 얼마를 주겠다고. 참 당돌하지 않아요? 사실 정 주임은 나에게도 찾아와 같은 제안을 했었거든요. 그렇지만 난 거절 했구요. 내가 거절하자 아버지뻘 손 주임님에게 찾아간 거였군요. 물론 난 손 주임님이 성과급 배분을 노리고 정 주임에게 투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궁금해서 난 물었죠.

“손 주임님 그러면 왜 정 주임의 제안을 받아 들였죠?”

“음...난 사실 우리 팀의 이 비밀 투표 짓거리가 장난처럼 느껴졌어. 좀 우습지 않아? 모조리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 안 해? 그래서 나도 장난 같은 결과를 만들고 싶었지 ㅋㅋㅋ” 

평소 손 주임님의 진지함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문자 메시지엔 장난꾸러기 같은 짖꿎음이 묻어났습니다. 

“그래서 주임님의 장난스런 결정이 초래한 결과를 어찌 생각해요?”

 나는 진지하게 물었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시간이 잠깐 흐른 후 손 주임님의 답이 왔습니다.

“글쎄, 어떤 결과가 최선이었을까? 그리고 그 결과가 최선의 결과라는 것을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답을 할 수 없었고, 우리 팀의 비밀투표는 이렇게 끝이 나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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