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연이 있어 우리는 만났을까.
이 인연은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만들어 냈을까.
작은 움직임만으로 우리는 닿았다.
나는 글을 썼고
당신은 읽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사는 마음이 태어났다.
당신이 멈춰 읽어주어
나에게서 멀어진 습작의 순간이
오래도록 살아남고,
당신이 놓고 간 짧은 기억으로
나는 다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문장들이
당신 마음 한두군데 두드렸다면
오늘은 그곳에 씨앗을 뿌리리라.
그곳에서 기쁘게 자라나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청유
Epilogue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연재 약속을 깨고 있다.
좋은 글이 중요한 것인지,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인지 답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다.
딱히 더 좋아질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고쳤어도 또 고칠게 생긴다.
완성하려면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금색 잉크는 꾸덕해 펜촉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다. 종이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진행되었다. 아주 싫은 경험이었다.
어떤 잉크라도 종이까지 잘 다다르게 하는 펜촉이 하나 있는데, 너무 친해지고 편해져서 관리에 소홀해지고 말았다. 부드럽게 나를 읽어주던 그녀는 이제 녹이 슬고 거칠어졌다.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새로 사지도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필기체로 낙관을 꾸며봤더니 크리스마스 기분이 든다.
어릴 적에 엄마의 엄청난 학구열로 필기체 과외도 받았더랬다. 필기체는 커녕 영어 자체도 생소한 때였다. 지금에 와 종종 필기체를 쓸 때면, 이때를 위한 엄마의 큰 그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산만함을 잡기 위해 글씨 공부를 시키는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어쩌면 엄마의 큰 그림은, 그냥 그림이 아닌 사랑과 간절함의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써보려니 숨도 절로 멈췄다. 조만간 멋지게 선보일 수 있길 바란다.
딥펜과 필기체의 만남은 미녀와 야수와도 같다. 어느 쪽이 미녀인지는 열린 결말로 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