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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과분했던 그것

by 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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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어색한 하루가 있어.



아이들의 개학식 날이나,

갑자기 약속이 취소된 날이나.


내가 허우적대던 잔 속의 물이

주르륵 비워져 버린 것 같아.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아도

숨 쉴 수 있게 됐지만

잔 밖으로 탈출할 방법도

물과 함께 사라진거야.


그런데 굳이 탈출해야 할까.

이 안은 보호되고 있는데.



하지만 잔 밖의 세상에

할 일은 너무나 많아.

그래서 나는

좁은 잔 속에서 손을 뻗지도 못한 채

불안에 잠식당하곤 해.



생각해보니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

그것을 멋지게 해냈거나 비참하게 실패해도

그다음 불안이 뒤를 지키고 있지.


그런데 참 이상해.

불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마음이 편하기도 해.

평온함이 어색해서

새로운 불안이 생기거든.


그렇다면 우리는

불안해야만 평온한걸까.


하지만 나는

불안에게 평온을 주고 싶어.


평온함이 나타나면

득달같이 엄습하는 불안에게

잠시 비키라 하든지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보다,


내 절친 불안아,

이 친구는 평온함이란다,

너의 자리를 뺏는 게 아니야,

그냥 안아주려는 거야,


이렇게 살살 달래준다면

평온과도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대체로 우리 인생은

이 삼각관계 속에서

때론 맞지 않은 옷을 입는 경험도 해보며

스스로의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아.


과분하게 예쁜 평온도 내 옷이고

과하게 큰 불안도 내 옷이니

이제 남은 건 나의 코디 실력.



아마도 있지,

비워진 잔 속은

불안도, 평온도 함께 들어와야지만

찰랑찰랑

아름다운 칵테일이 되어

황홀히 취할 순간을 줄지도 몰라.



그러니 괜찮아보자.

모두가 그렇게 살아내고 있어.

평온을 사랑하면서도

불안에 미련을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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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3_152159.jpg 진짜 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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