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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Oct 21. 2024

4. 재취업한 직업은 임산부예요.

그녀는 존재하기 전부터 청개구리였죠.

둘째 임신을 포기하며 이제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취업사이트를 뒤적거려봤다.


예전에 일하던 분야는 야근이 보편적 필수라 육아와 병행할 수 없었다. 제외를 시키고 나니 어느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리저리, 정체성 없이 커서가 움직였다.


기획과 카피라이팅. 그땐 그걸 딱히 기술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저 업계에 오래 붙어있던 순서대로 잘 팔리는 그런 존재였다. 그마저도 빈틈이 있던 사람에겐 재취업의 기회가 잘 오지 않았는데 그건 유행에 민감해서였다.


'나는 유행 안 좋아하는데.. 왜 이런 걸 하고 있었냐.. 손기술이나 배워둘 것이지.. '


경력단절이 있었던 엄마들은 알 것이다. 다시 일할 곳이 마땅치 않을 때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래서 육아를 하는 도중에도 틈틈이 자기계발을 하고 재주를 늘려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바뀌었다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나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고, 예전 일이 나를 기다릴지 말지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매일 봐도 똑같은 취업사이트를 의미 없이 둘러보고 있던 중 놀랍게도 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애기 많이 컸어?"


싫어하는 사람이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냈던 타 부서 부장님이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을 준거다.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이었지만 애 키우는 데에 지장이 없어야 해서 정중히 거절했다.


"전에는 개발부니까 개발해야 돼서 바빴지만 여기 운영부는 운영하는 거라 안 바빠~"

.....?

"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터져 나온 웃음으로 거절을 대신했다.

보이스피싱 회사인데요~ 피싱 좀 하려고요~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제쳐놓고, 종알종알 육아 이야기로 수다만 떨다가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씁쓸함 기분이 들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기회는 또 있겠지. 허전한 마음으로 핫도그를 한 입 왕 베어 물었다. 딸과 함께 나 한 입 너 한 입 나눠먹던 맛있는 핫도그가 쓰다. 아, 산후 우울증을 넘기고 나니 이젠 경력단절 우울증인건가. 새롭게 인생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무력함 앞에서는 한낱 환상일 뿐이니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옆에서 우리 딸 핫도그 깨무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이걸 잡아먹을 수도 없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 감정을 이해하는 딸바보엄빠들이 있을 거라 믿어요)




며칠이 지나도 음식의 쓴 맛이 사라지지 않았다.

적당한 일을 찾지 못해 풀이 죽어 있던 터라 필시 우울증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꽤나 오랜 기간 생리를 안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임신이었다.


인체는 참으로 신비롭다.

감각의 유기성은 어디까지 뻗쳐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임신을 포기하며 작용했을 유리함과 그걸 알아차리게끔 만드는 반작용까지, 이 모든 게 논리적 설명이 가능한 부분일까. 미지의 학문 탐구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임신 7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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